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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필호가 남양중학을 졸업하는 날이었다. 어느 새 그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필호의 졸업식에는 꽤 많은 하객이 참석했다. 신규식과 민제호는 각각 스승과 형으로서 누구보다도 그의 졸업을 기뻐했다. 김태수는 손목시계를, 백주원은 나침반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곧 운남군관학교로 유학 가게 되어 있는 친구 이범석은 정성껏 그린 카드를 꽃다발과 함께 내밀었다.

신규식은 필호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옆에는 민제호가 앉아 있었다.

“독립운동도 우선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 형과도 상의를 마쳤다. 상해에 있는 중국 교통부 체신학교에 바로 입학해라. 입학과 동시에 중국 공무원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 그래야 신원이 확실해져 혹시 조선에 가더라도 덜 위험하다.”

그 동안 몇 차례 언질이 있어서 필호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신규식은 다시 한 번 본인의 뜻을 확인하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민필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좋은 권고를 했을 때 그것을 머뭇거림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그 사람의 역량이었다. 이범석은 처음 군관학교로 가라고 했을 때 조금 실망하는 듯하더니 얼마 후 신규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민필호는 달랐다. 신규식이 보기에 민필호만큼 자기 능력을 잘 헤아리는 청년은 드물었다.

신규식은 독립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확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상해의 박달학원과 ‘동제사’는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는 국내와 러시아와 동경까지 아우르는 연계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령이나 서북간도의 독립군과 연계하기 위해서는 중국 본토에도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한 신규식은 이미 박찬익에게 위촉하여 일을 벌이고 있었다.

박찬익은 간도에서 서로군정서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고 1912년에도 조소앙, 여시영 등과 함께 길주에서 대한독립의용군을 만든 적이 있었다. 신규식은 대도시인 북경쯤에 군사 조직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어려움은 자금 문제였다. 그동안 박달학원과 동제사, 그리고 중국 혁명대와의 유대 구축을 위해 전념하다 보니 군사 조직까지 갖출 여력이 없는 것이었다.

신규식은 박찬익을 불렀다.
“박 동지가 국내에 잠입해서 자금을 모으는 것이 어떻겠소?”
박찬익은 이미 일본 관헌에 수배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군자금을 조달하려면 책임자가 나서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나도 따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겠소.”

신규식은 민필호와 김태수와 백주원을 불러들였다.
“조사해 보니 백 동지는 수배자 명단에 없어. 민필호는 중국 공무원 신분증이 있고. 그러니 두 사람이 부부처럼 행세하면서 국내에 한 번 다녀오시오.”
신규식은 김태수에게 그윽한 눈길을 보냈다.
“태수에게도 맞는 일이 하나 있는데 맡아 볼 텐가?”
신규식은 김태수에게 북경에 다녀오라고 했다. 북경 인근에 있는 몇 개 독립 단체와 독립군들에게 군자금도 지원하면서 그곳의 실태를 파악해 오라고 했다. 김태수는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백주원과 민필호는 산동반도 동북 끝에 있는 연대(옌타이)에 가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기로 했다. 그들은 신혼부부가 입는 한복을 준비했다. 신규식의 공작실에서 그들은 옷을 입어 보았다. 왠지 민필호는 좀 안 어울렸지만 백주원은 눈부실 정도로 옷맵시가 났다. 민필호는 괜히 기분이 으쓱해졌다. 그러자 김태수가 민필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결혼 사진 한 방 크게 박아서 증거로 사용해 봐. 백 동지는 이제 시집가기 어려워질 거야.”

백주원과 민필호의 일정은 보름 정도로 잡혔다. 신규식은 동제사 이사장 명의로 지령서를 작성해 백주원과 민필호에게 열람케 한 후 서명하도록 했다. 신규식은 공식 지령과는 별도로 자기 집에 가서 아내를 만나보라고 했다. 그는 적당한 때에 아내 조정완과 딸 신명호를 데려올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래서 상해로 오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준비할 점과 당부하는 말을 전하려 했다.

“고향에 내 처와 딸이 살고 있다. 처는 더 늙었을 것이고 딸은 처녀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한 번 만나서 내 말을 전해 다오.”

백주원과 민필호가 밀서를 가지고 만나야 할 국내 인사 중에는 흥사단을 이끌고 있는 안창호가 있었고 맨 마지막 명단에는 서울 숭교방에 사는 김인용도 있었다.

“김인용이란 분은 처음 들어 보는 인물입니다.”

민필호가 말하자 백주원은 그가 누군지 정도는 안다고 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중에 박찬익과 서울 덕수궁에서 만나 중간 점검을 한 후 향후 일정을 논의하기로 했다.

기이한 합석

김태수는 북경 여행에서 아주 많은 것을 보고 겪었다. 본질적으로 그는 한량이고 풍류객이었다. 그는 먼저 유람을 한 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예정보다 3일을 당겨 출발했다. 어차피 백주원도 없는 중국 땅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람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6개 왕조의 도읍지로 3,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북경을 향해 가볍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왜 그리도 마음이 가볍고 한가로운지를 알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백주원이라는 집착의 대상이 일단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북경에 가서 경극을 감상하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저녁에는 북경 오리구이를 먹었다. 그는 중국과 영욕을 함께 한 천안문을 고개가 아플 정도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만리장성에도 가 보았다. 햇볕에 잘 말린 벽돌만으로 상단 폭이 4미터가 넘게 만 리 산길을 가로 질러 쌓을 수 있는 괴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지를 헤아리기란 쉽지 않았다.

김태수는 황강을 타고 성벽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민필호와 함께 서울에 간 백주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그는 갑자기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얼마 후 그는 황제 13명과 황후 23명이 묻혀 있는 명릉과 3,000채에 이르는 전각과 누각과 정자가 있는 서태후의 여름 별장에도 가 보았다.

그러나 정작 김태수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만든 것은 이국의 문화유산이 아니었다. 그를 정말로 놀라게 한 것은 조선독립군이라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상이었다. 대관절 조국이 뭐라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나라가 무엇이기에 그들은 그런 고역을 선택하는 것일까? 김태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주리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도 의복을 제대로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쌀밥과 반찬 대신 모래알 같은 조밥에 날된장이나 저린 무를 먹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떨어지면 좁쌀 가루에 소금을 섞어서 먹는다고도 했다. 생밀이나 강냉이나 떡호박은 그들에게 아주 진귀한 요리에 속했다.

그들은 백 근이 넘는 무장을 하고 하루에 백오십리 길을 행군한다고도 했다. 영하 30도의 추위는 보통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처럼 솜 군복이 지급되면 환호성을 올렸다. 그들에게는 소독약이란 게 없었다. 그래서 상처 구멍을 째서 숯가루를 우겨 넣었다. 그래야 화농을 막을 수 있었다. 큰 부상을 입으면 자살로 해결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조국을 증오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바이칼 호수의 빙설을 물들이며 수백 개 꽃잎 모양으로 도살된 동포들의 시체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계곡에 쌓인 눈 위로 동지의 피가 얼룩지고 그 피 향기를 시베리아의 바람이 휩쓸어 갈 때 그들은 조국을 증오해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떠나서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들은 행군 중에 고향의 풀포기와 닮은 것을 보게 되면 소중히 포개어 호주머니에 넣었고, 조국의 산천과 비슷한 지형이 나오면 울컥 눈자위가 빨개지기 일쑤였다.

월나라 새는 둥우리를 틀 때 한사코 남쪽 가지를 잡고, 몽고의 말은 북쪽 바람이 불어야만 운다고 했다. 그리고 여우는 태어난 굴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고도 했다. 그들에게 고향은 금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이 되어서 달밤에 개 짖는 소리 하나에도 처절하게 흥분된다고 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입니다.



태그:#조선독립군, #동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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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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