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04 07:00최종 업데이트 24.07.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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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 삼양식품

 
라면이 처음 나온 것은 1963년이었다... 이 배고픈 시절에 나타난 라면의 맛은 경이로운 행복감을 싼값으로 대량공급했다. 그 맛의 놀라움은 장님의 눈뜸과도 같았고, '불의 발견'과 맞먹을 만했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중)
 
1963년, 그해 처음 나온 라면은 '삼양라면'이었다. 춘궁기가 닥치면 2백만 명 이상이 굶주렸다던 그 시절, 일본에서 맛본 인스턴트 라면을 본떠 우리만의 라면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가 있었다. '삼양식품'을 세운 고 전중윤 회장이다. 그리고 이곳 익산은 그에게 또 다른 고향이었다.

전중윤 전 회장은 일제강점기이던 1919년,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달전리에서 태어났다. 해방을 맞아 아내와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그는 안타깝게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다시 도망치듯 회사 동료의 고향인 익산으로 떠나야 했다. 그땐 기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익산에서 멈춰 섰던 피란민들이 적지 않았다. 익산은 그들 모두를 따뜻하게 품어준 도시이기도 하다. 

전 전 회장도 동료와 동네 이웃들의 도움으로 작은 집을 얻어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 십여 년 만에 삼양식품을 일군 그는 훗날 익산에 라면공장을 세웠다. 1971년 준공식을 맞아 오랜만에 이 도시를 찾은 그는 20년 전의 기억을 꺼냈다. 
 
"이곳 이리시는 본인이 6·25 동란 때 2년 동안 피난을 와서 보살핌을 받았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고장입니다. 이곳에 호남공장이 건설되게 되었음을 참으로 뜻깊게 생각합니다." (<익산열린신문>(2021.9.17))
 

1971년 삼양식품 익산공장 준공식 ⓒ 삼양식품

 
익산이 기억하는 '삼양라면'의 맛

옛 이리역 주변과 중앙동엔 연탄공장들이 많았다. 멀리 탄광에서 기차로 실어 온 석탄들을 역에 붙어있던 널찍한 야적장에 부려놓으면 가까운 연탄공장들이 가져다가 연탄을 찍어냈다.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가 터질 때까지 부모가 합동연탄공장을 운영했다는 문성록 원광대학교 의대 교수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연탄 배달부들 틈에서 먹었던 삼양라면의 맛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연탄을 리어카에 100장씩 실어서 배달했는데, 아저씨들이 일을 마치고 오면 새거리(새참)로 라면을 끓여줬다. 창고엔 삼양라면이 박스 채로 쌓여있었고, 커다란 연탄난로 위에 들통으로 물을 끓이다가 아저씨들이 돌아올 때쯤 양은냄비에 라면이랑 뜨거운 물을 붓고 계란 하나, 파를 넣어서 금방 끓여냈다. 나는 사장 아들이라 경리 누나들이 소시지도 넣어줬는데, 너무너무 맛있었다."
 

한때 익산엔 연탄공장들이 많았다. ⓒ 익산시

 
그 시절 삼양라면의 맛을 기억하는 건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다. 한때 익산엔 멀리서 기차로 통학을 하거나 방을 얻어 살던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도 라면은 없어선 안 될 먹거리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세운 이리농림학교와 해방 직후 문을 연 남성고등학교 그리고 박정희 정부가 세운 이리기계공업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익산은 한때 '교육의 도시'로 불릴 만큼 이름 난 학교들이 많았다.

아침 저녁이면 새까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역 앞을 가득 메웠는데, 누군가는 그걸 보고 '까마귀떼' 같다고도 했다. 형편이 조금 나은 이들은 자취나 하숙을 하기도 했지만, 냉장고조차 없던 좁디좁은 자취방에서 배고픈 청춘들은 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라면하고 같이 살았다. 밥을 해 먹기 싫은 게으른 자취생에게 라면은 부식이 아니라 훌륭한 주식이었다. 쌀은 떨어져도 라면 박스만 비어 있지 않으면 걱정이 없었다. (안도현의 '라면 예찬' 중)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천막촌의 모습. 삼양라면 상자가 보인다. ⓒ 익산시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천막촌에 전해진 보급품들 ⓒ 익산시

   
'이리역 폭발 사고'에도 삼양라면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폭발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은 소라단 천막촌에서 급한 대로 라면으로 배고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세창 상회에서 사 온 라면으로 저녁상을 차렸다. 빨간 봉지의 라면 하나에 밥 한 공기를 말면 한 끼 식사가 뚝딱이었지만 라면 값도 싼 편은 아니어서 자주 먹지는 못했다...
다음 날부터는 걱정 하나가 줄어들었다. 빨간 십자가 모자를 쓴 적십자 사람들이 와서 끼니 때마다 라면을 끓여 나눠 주었기 때문이었다. 송아지라도 목욕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솥 
세 개가 공터에 걸렸다. 솥 하나에 라면 팔십 개를 한꺼번에 끓일 수 있었지만 줄을 선 사람들이 하도 많아 적십자 사람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김남중의 <기찻길 옆 동네> 중)

국민의 배고픔 달래주던 삼양라면

1960-70년대에 라면이 삼양라면밖에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삼양라면이 익산 사람들의 배고픔을 달래는 데 한몫 단단히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시절 삼양라면엔 국민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싶었던 전중윤 전 회장의 바람도 담겨 있었다.

일본 인스턴트 라면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지만 삼양라면은 일본의 그것보다 더 넉넉하면서도 값은 더 쌌다. 삼양라면이 처음 세상에 나온 1963년, 라면 한 봉지의 무게는 100g, 가격은 10원이었는데, 우리보다 5년 앞서 나온 일본의 '치킨라면'은 대략 한 봉지 무게가 85g이었고, 가격은 35엔(우동 한 그릇이 60엔)이었다. 담배 한 갑이 25원, 자장면 한 그릇이 40원이었으니 삼양라면을 얼마나 싸게 내놓았는지 알 수 있다.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던 당시 전중윤 전 회장 ⓒ 삼양식품

 
그가 라면값을 비싸게 받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1961년 어느 날, 제일생명의 전문경영인으로 일하던 전 전 회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가 허름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국 한 그릇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풍경을 보게 된다. '대체 무얼까', 궁금했던 그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 5원을 내고 국 한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 자리에서 국을 떠먹었는데, 첫술에 무언가가 씹히길래 빼서 보니 깨진 단추조각이었고, 다시 한 번 휘저으니 이번엔 담배꽁초가 나왔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었던 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잔반과 음식물쓰레기를 모아 끓여낸 이른바 '꿀꿀이죽'이었다. 버린 지 한참이 지난 음식물쓰레기를 섞어 끓여내는 통에 탈이 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30원어치면 여덟 식구가 아침을 먹고 점심을 굶을 수가 있어서..."
보채볼 맥조차 잃은 어린 것을 등에 메고 '꿀꿀이죽'을 한 통 사서 든 중년 아주머니의 기가 막힌 변... 담배꽁초, 휴지(무엇에 썼는지도 모름) 등 별의별 물건이 마구 섞여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이 반액체를 갈구해야만 하는 이 대열! 그들은 돼지의 피가 섞여서가 아니다. 우리의 핏줄이요 가난한 이웃일 따름이다. (<경향신문>(1964.5.20.))

그는 그 길로 제일생명을 나와 식용유 회사를 인수해 삼양제유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다. 라면을 만들려면 면을 잘 튀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삼양공업주식회사를 거쳐 삼양식품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건 1965년의 일이었다.

삼양식품의 위기, 그리고 이어지는 익산과의 인연
 

투서 한 장으로 시작된 이른바 '우지파동' ⓒ 조선일보

 
1963년부터 20년 넘게 업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던 삼양식품에 큰 위기가 닥친 건 1980년대 말이었다. 1989년 10월 검찰에 '공업용 우지(소기름)로 라면을 튀긴다'는 투서가 날아든 것. 이 일로 미국에서 소기름을 들여와 쓰던 삼양식품, 오뚜기, 서울하인즈, 삼립유지, 부산유지 등 5개 기업 대표와 임원들이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다.

7년 9개월에 걸친 긴 재판 끝에 1997년 8월, 대법원은 삼양식품을 비롯한 이들 기업 모두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우지는 우리 사회의 식생활 관행과 사회 통념에 비추어 식용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미국에선 사골, 우족, 내장 등을 먹지 않아 버릴 뿐 결코 공업용이 아닐뿐더러 "(우지의) 안전성이 입증된다"고 본 것이다.
 

긴 재판 끝에 삼양식품을 비롯한 모든 기업이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 한겨레

 
하지만 그 사이 삼양식품은 거의 문을 닫을 뻔했다. 1천 여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나야 했고, 1980년대 말부터 삼양식품과 업계 1위 자리를 두고 엎치락뒤치락 다투던 농심에 오랫동안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박헌재 전 익산상공회의소 부회장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잘못 판단한 사안이고, 삼양라면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알리려고 상공회의소 차원에서 애를 많이 썼다"고 기억했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중앙정부에 건의도 하고, 전국 상공회의소들에도 공문을 보내 삼양식품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했다."


그런 지역사회의 노력에도 익산공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멀리 원주공장으로 파견을 가야했다. 다행히 익산공장에서 어렵게 개발한 쌀라면이 인기를 얻으면서 떠났던 직원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전영일 전 익산공장장은 "익산공장은 삼양식품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도약한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익산하면 떠오르는 먹을거리 '삼양라면'

전중윤 전 회장은 2014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익산과 삼양라면은 지금도 끈끈하다. '불닭볶음면'을 개발한 김정수 삼양라운드스퀘어 부회장도 창업자의 뜻을 잊지 않고 있다('삼양식품그룹'은 지난해 삼양라면 출시 60주년을 맞아 그룹 이름을 '삼양라운드스퀘어'로 바꿨다). 전영일 전 공장장은 "전중윤 전 회장의 며느리인 김정수 대표는 익산공장에 부임하는 공장장들에게 '선대들이 익산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아꼈다. 공장운영뿐만 아니라 익산시민, 지역사회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각별히 당부한다"고 했다(<익산열린신문>(2021.9.17)).

익산공장에선 지금도 260여 명의 임직원이 월 200여 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2021년 기준으로 삼양식품 전체매출의 약 30%에 달하는 규모다. 또 익산은 다른 지역에 견줘 삼양라면 소비량이 전국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높은 도시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깨어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였다... 철은 갑작스레 살아나는 식욕으로, 그러나 아주 공손하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의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있는 듯했다. (이문열의 <변경> 중)

그래서다. 누군가 내게 익산하면 떠오르는 먹거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앞으로 '삼양라면'이라고 말할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한 글]
- 김정현, 한종수, <라면의 재발견>(2021).
- 송태영, "'라면의 제왕' 전영일 삼양식품 익산공장장 전격인터뷰"(202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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