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01 18:11최종 업데이트 24.07.0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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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화기념공원의 한영현 묘소 한영현의 영혼은 2021년 4월 24일 이곳에 모셔졌다. ⓒ 민병래

 
- <'내 탓에 한양대 운동권 쑥대밭' 그는 실탄을 꺼냈다>(https://omn.kr/299dl)에서 이어집니다.

한영현님의 산화 이후 확인되거나 진행된 중요한 사실을 정리했다.

한영현님이 사용한 총기에 대해

한영현이 산화한 시각은 1983년 7월 2일 09:45분 경이고 장소는 대대 거점 방어훈련 장소인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로 적근산 줄기가 이어지는 곳이다. 이날 새벽 6시 훈련이 종료되어 분대원들은 복귀 명령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한영현이 속한 분대의 대원들은 텐트를 치고 중대막사에서 가져온 아침 식사를 했다. 이때 분대원 남OO은 훈련 종료 후에 졸병에게 "본인의 군장과 총을 참호에 갖다 놓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런 경위로 남OO의 총이 한영현이 산화한 참호에 놓여있었다. 이를 한영현은 눈여겨 보고 산화할 때 이 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총을 들고 혼자서 이동하면 의심을 살 것이라고 판단해 이 방법을 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고가 난 후 한영현이 속했던 8연대장은 총기 관리에 대해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 중대장에게 한영현의 총에 실탄을 넣고 허공에 한 발을 쏘라는 지시를 내린다. 중대장과 부대원은 대대장의 지시에 따랐고 사망 현장에 한영현의 총기를 가져다 놓았다. 이는 헌병대 7사단의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부검과 화장에 대해

한영현님의 형, 한강현은 연락을 받고 7월 3일 친구와 함께 화천군에 도착해 해동여관에 묵는다. 다음 날 09:00시, 그는 사단보급수송대 영현안치소에서 한영현의 사체를 확인한다. 한강현은 동생이 자살할 이유가 없고 유서가 없다는 점, 02:00시에 불침번을 서면서 실탄을 훔쳤다면 곧바로 결행할 수 있는데 09:00시가 넘어서 실행했다는 점을 들어, 의혹이 많다며 부검을 요구했다. 그러나 7사단 측은 이를 거부하고 화장을 종용했다. 한강현은 7월 4일 11:00시 화장동의서를 쓸 수밖에 없었고 한영현의 유해는 춘천시 동내면 학곡리에 있는 시립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변했고 형 한강현은 화장장 뒷산에 한영현의 유해를 뿌렸다.

화장 이후 7사단 헌병대의 사건 종결

7사단 헌병대는 조서에서 아래와 같이 사고 원인을 적었다
 
평소 가정 형편 (모친은 돌아가시고 부친은 교도소에 복역 중, 형은 중증장애인이고, 자신이 차남이나 장남 구실을 해야 하며, 가지고 있는 재산이 100여만 원 미만으로 남은 가족 생계 곤란)으로 인해 염세비관하고 자신이 특수학적 변동자이며 요관찰 중인 것을 고민, 염세 비관한 나머지 자살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001년 진행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문

한영현의 형, 한강현은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소속으로 출발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동년 12월 28일 한영현의 죽음에 관한 진상을 밝혀줄 것을 진정하였다.

1) 의문사위는 이 진정을 받아들여 2001년 1월 13일 조사개시를 결정한다. 한영현의 분대원, 성동서 정보과 직원, 보안사 녹화사업 시행부서 관련자, 207보안부대 관계자 등 총 90명을 조사하고
2) 의문사위는 또한 국방부와 기무사령부(보안사의 후신)에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하였다. 국방부는 7사단 헌병대의 수사기록을 제출했으나 기무사는 심사보고서, 활용보고서 등을 포함한 녹화사업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3) 의문사위는 또 7사단 사령부, 207보안부대, 7사단 신병교육대, 사망 현장 등을 현장 조사하였다. 여기서 사망한 현장 주변과 실거리를 측정하고 사진 촬영을 하였다
4) 의문사위는 이런 조사를 거쳐
한영현의 자살은 당시 권위주의 통치하에 보안사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에 항거한 것으로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한영현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했다. 또한 한영현의 사망은 비록 자살에 의한 것일지라도 당시 한영현은 자살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었고, 보안사의 위법한 조사 및 한영현이 정신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프락치 강요( 이로 인한 운동권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등이 있었던 것인 바, 보안사의 심사 활용 과정과 한영현의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에 충분하므로 한영현은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한다고 결정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와 결론

2005년 발족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과거 의문사위에서 확보하지 못한 자료, <특변자 사고관계철> <특수학변자 신상카드> <특변자 출타보고> 등을 기무사로부터 제출받았다.

한영현의 <특수학변자 신상카드>는 1983년 말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따르면 한영현은 B등급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편입 사유란에는 한양대 5인방 사건 관련으로 기록되어 있어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강제징집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변자 출타보고>를 보면, 207보안부대에서 1983년 6월 10일 자로 한영현이 포상 휴가로 출타할 예정임을 심사과에 보고하여 심사과장이 전결 처리한 문서가 있는데 이 문서에 '학원 접촉'이라는 문구가 수기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학원 동향 수집을 위해 휴가 형식을 빌려 별도 임무를 부여한 방증으로 볼 수 있다.

한영현의 묘소

한영현의 유족, '한양대민주청년동문회'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등은 이천민주화기념공원에 한영현의 묘소를 만들기로 뜻을 모은다. 문제는 시신이 없고 유해마저 흩뿌려졌기에 묘소에 모실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이때 뜻을 모은 게 한영현의 삶에서 의미가 있는 네 군데의 흙을 떠 와 항아리에 담고 이를 유해 대신 묘소에 모시기로 했다.

네 군데는 모교인 인천고등학교, 한양대학교, 화장터와 사망한 참호 근처의 흙이다. 인천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의 흙은 애로가 없었지만 화장터의 흙과 사망한 장소의 흙은 떠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1983년의 화장터가 없어진 상태였다. 이 부지가 춘천시 도시계획에 따라 법조타운이 만들어질 예정이어서 화장터를 포함해 인근 구역이 다 헐린 상태여서 장소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마침 이문범과 함께 택시노동운동을 했던 동료가 강원대 출신으로 화장터 옆에 집이 있었기에 장소를 짚어주었다. 그렇게해서 화장터의 흙은 해결이 되었다.
  

한영현이 재가 된 춘천 시립 화장장 터에서. 한양대동문과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진상규명대책위' 관계자는 한영현의 묘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흙을 퍼갔다. ⓒ 이문범 제공


그다음이 목숨을 끊은 지점의 흙을 떠오는 문제인데 이곳은 민통선 안이고 당시 코로나19 기간이어서 군부대가 거부하면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이때가 문재인 정부 시절이라 청와대에 민원을 넣은 게 효과가 있어 사단 사령부가 협조를 해줬다. 이문범을 비롯한 한양대 동문 다섯 명, 박제호를 비롯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대책위 관계자 등 10명이 현장에 갔는데 이미 부대 관계자가 위치를 파악해 놓고 있었다.
 

한영현이 '칠성83' 훈련을 받은 적근산. 휴전선 바로 밑이다. ⓒ 박제호 제공

 

한영현이 산화한 곳으로 추정되는 적근산 줄기에서 제를 올리는 모습 한양대동문과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상규명대책위 관계자 10명이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이곳에서 흙을 떠 한영현의 묘소를 조성했다. ⓒ 이문범

    
문제는 이곳으로 올라가는 과정이었다. 적근산이 1071M 고지이고 '칠성 83 훈련'이 산줄기를 따라 고지대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군부대의 방어개념이 산을 중심으로 진지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도로축을 방어하는 것으로 바뀌어 '칠성 83' 당시의 참호나 벙커 같은 곳은 방치된 상태였고 여기에 이르는 길도 숲이 우거진 상태였다.

숲을 헤치고 길을 열면서 한양대 동문과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대책위 관계자 10명은 현장에 도착했고 여기서 제를 올리고 흙을 떠왔다. 이렇게 해서 한영현님의 영혼은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2021년 4월 24일 자리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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