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01 11:22최종 업데이트 24.07.0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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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7일 오전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이 광화문과 홍례문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 ⓒ 권우성

 
7월 23일은 조선왕조가 두 번이나 휘청거린 날이다. 음력으로 6월 9일인 1882년 7월 23일에는 한양 시민들과 하급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켜 고종의 왕권이 정지됐다. 고종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군이 출동한 뒤인 양력 8월 말에 가서야 상황이 종료됐다.

음력으로 6월 21일인 1894년 7월 23일에는 동학혁명 진압과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조선에 무단 침입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고종의 러시아공관 피신) 때까지 고종이 허수아비로 지내야 했다. 그런 점에서 1894년 그날은 '일본의 힘'이 발휘된 날이다.


두 개의 7월 23일이 띠는 공통점은 고종의 왕권이 정지됐다는 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일본과 관련이 있다. 일본은 1882년에는 자국 교민과 공사관이 임오군란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조선과 제물포조약을, 청나라와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전자는 일본공사관 호위를 위해 병력을 파견할 수 있다는 것이고, 후자는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는 일본도 파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두 조약은 1894년에 일본군이 침입하는 빌미가 됐다. 이런 점에서도 12년 간격인 두 개의 7월 23일은 상호 연동된다.

왜 '일본군 침공'이 아니라 '일본군 파병'이라 부르나

'일본의 힘'이 발휘된 1894년 7월 23일은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데도 한국인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갑오경장이니 갑오개혁이니 하는 미사여구로 포장된 타율적인 제도 개편도 이 시기에 있었다. 긍정적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이 제도 개편의 본질은 일본의 정치적 진출이 용이한 상태로 조선을 개조하는 것이었다.

7월 23일부터 조성된 억압적 구도는 조선 사람들에게 끔찍한 기억도 안겨줬다. 1895년 10월 8일(음력8.20)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도 이 구도 안에서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일본은 친일 정부인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각종 제도를 바꾸고 친일파를 부식하는 방법으로 조선을 약화시켰다. 이런 작업이 사전에 있었기에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도 그만큼 수월했다. 그래서 조선의 멸망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이후가 아니라 1894년 7월 23일 경복궁 점령 이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군을 제압하자, 두 개의 군대가 혁명군을 진압하러 들어왔다. 청나라 군대는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 군대는 그런 요청 없이 들어왔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고종시대사> 제3집에 따르면 1894년 6월 8일(음5.5)에 외교부 장관인 조병직 독판교섭통상사무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임시대리공사에게 '파병을 정지시킬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일본군을 상대로 '들어오지 말라'는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던 것이다.

이랬는데도 다음날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그래서 이것은 명백한 침략이었다. 7천이나 되는 대병력이 들어왔으니 침략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이 병력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 뒤 조선 민중의 역량을 대표하는 동학군을 진압했다.

조선 정부가 청나라군을 부른 것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힘들어서였다. 정부군보다 강력한 동학군을 진압한 것은 조선의 항일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는 것도 그만큼 수월했다.

그렇지만 한국 역사학계는 1894년의 일을 '일본군 침략'이나 '일본군 침공'이 아닌 '일본군 파견', '일본 파병', '일본군 출병', '일본군 상륙' 등으로 부른다. 이해에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받은 사실을 아는 한국인들은 별로 없다.

1894년 7월 23일의 의미 정확히 알려져야

지난달 30일 경기도 하남YMCA교회에서 '일제침략의 정확한 개시 시점'이라는 주제로 열린 일제청산연구소 제13차 월례포럼 때 필자가 발표했듯이, 한국 역사학계가 그런 표현들을 사용하는 데는 일본의 영향도 적지 않다. 일본 자신이 출병으로 표현하며 사건의 의의를 낮춰왔고 이것이 일제강점기 역사교육을 거쳐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도 '일본 출병'이 한국인들에게 주입됐다는 점은 1931년 1월 18일자 <조선일보> 2면 좌하단의 역사 코너 같은 데서도 확인된다. 청나라군이 동학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충청도 아산에 상륙한 직후의 상황을 이 기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급보를 들은 일본에서는 그때 일본공사 대조규개(大鳥圭介)를 급히 돌아오게 하는 동시에, 일본 군대도 수천여 명을 경성에 출병케 하엿다. 그리하여 일변으로는 청국에 대하여 그 천진조약의 배위를 책망하고 일방적으로는 조선의 정무개혁을 요구하야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니 이것이 즉 갑오개혁이라는 것이다."

침공을 출병으로, 내정간섭을 개혁으로 표기하는 이런 서술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역사 인식을 좌우하고 있다. 일본이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한국인들의 감정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서구화 노선을 지향한 일본은 1870년대부터 동아시아 해양권을 집중 공략했다. 1874년에 대만을 침공하고 1875년에 강화도에서 도발하고 1879년에 오키나와를 강점하고 1894년에 조선을 '침공'하고 1895년에 대만을 강점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1840년 아편전쟁 이래로 동아시아 주도권을 행사해온 서양열강과 협력하고 이들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침략을 이어갔다.

일본이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과의 충돌을 피하고 이들의 협조를 받으며 동아시아 침공을 진행하기 위해 선택한 명분은 동양평화 확립이다. 일본은 동양 국가들의 독립과 지역 평화를 위해 이 나라들을 돕는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논리는 조선과 관련해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됐다. 조선의 독립을 보호하고 동양의 평화를 지킨다는 논리가 일본에 의해 강조됐다.
 

일제청산연구소 제13차 월례포럼 때 사용된 파워포인트 화면. ⓒ 김종성

 
위 포럼 때 제시한 파워포인트 화면에서도 나타나듯이,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제1조에 "서로 동등한 예의로써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일본은 경복궁 점령 다음 달인 1894년 8월 26일 강제한 조일공수동맹(한일공수동맹·한일양국맹약) 서문에는 "양국이 공동 제사(濟事)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를 삽입했다. 조선 문제를 일본이 함부로 다루지 않고 조선과 협의해 공동으로 처리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끝낸 일본이 청나라와의 강화조약 체결 과정에서 '신신당부'한 내용이 시모노세키조약(하관조약·마관조약) 제1조에 들어갔다.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는 문구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개입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담았지만, 이 전쟁을 지켜보며 일본을 응원해 준 서양열강에게 보여주려는 목적도 담은 조항이다.

러일전쟁 발발 15일 뒤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제했다. 유사시에 일본군이 군사기지를 둘 수 있게 하는 늑약이었다. 이 늑약 제1조는 "한·일 양 체약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의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라고 선언했다.

일본과 서양의 협조체제는 일본이 만주를 독식하려는 속내가 드러난 1931년 만주사변 직전까지 유지됐다. 그전까지 일본은 서양열강과 공조하며 이들의 협력과 묵인하에 조선·청나라·오키나와를 압박했다. 일본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원하고 동양 평화를 확립한다는 명분을 유별나게 내세운 것은 이 침략 과정에 대한 서양열강의 견제를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이 지역을 욕심내는 서양열강이 일본의 과욕 내지는 야욕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담았다.

이는 한일관계에서 1894년의 의미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1894년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행동을 취한 연도다. 그런데도 이해에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 것만 부각되고, 일본이 한양을 점령한 일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조선 출병 같은 완화된 용어로 불려지고, 외교적 방식에 의한 침략인 1905년 을사늑약이 커다랗게 부각됐다.

1894년 7월 23일의 의미가 정확히 조명되면, 일제의 한국침략 과정이 좀더 명확히 밝혀질 수 있다. 꼭 지나간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보다도 앞으로 닥쳐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1894년 그날의 의미가 정확히 알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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