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9 11:23최종 업데이트 24.06.2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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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은 상반된 이미지를 풍긴다. 압제에서 벗어나는 환희의 이미지와 남북이 분단되고 외국군들이 주둔하는 우울한 이미지가 겹친다.

일제 강점기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정치적 주권에 대한 제약은 해방 뒤에도 여전했다. 남한의 경우에는 일제 지배자들의 자리가 친일파들로 채워지면서 이들이 더욱 강해졌다.


그런데 한글은 이런 분위기에서도 대성공을 거뒀다. 남북 모두 한글만 알면 일상생활에 별 불편 없는 나라가 됐다. 이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그전에도 없었던 상태다. 외국의 간섭을 받는 민족은 자기 문자를 지키기 어려운데도, 한글만큼은 이런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해방 뒤에 훨씬 강해진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자기 글을 지키기 위한 한민족의 집념이 대단했기 때문이고, 한민족이 이 집념을 발현할 수 있도록 주시경의 제자들이 헌신적으로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해방정국하에서 주시경의 제자들만큼 외세의 영향을 잘 막아내고 대중의 지지를 훌륭히 이끌어낸 집단은 드물다.

주시경의 제자들은 이북으로도 갔다. 수제자인 최현배는 이남에 정착했고 또 다른 수제자인 김두봉은 이북에 정착했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남북 양쪽에서 자리를 잡은 것은 해방 이후의 한글운동이 상당 수준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2008년 2월 <역사비평>에 실린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논문 '최현배와 김두봉 – 언어의 분단을 막은 두 한글학자'는 "주시경의 제자인 정열모 외에 유열·홍기문·김수경·김병제 등도 북한을 선택했다"고 알려준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주시경의 제자들이 각각의 구역에서 언어 권력을 가진 것이 한글의 분단을 상당 수준으로 막아내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지루해 보이는 일과는 한글 독립운동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소장 북한 인물 자료에 있는 김두봉의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갑신정변 5년 뒤인 1889년에 부산 동래에서 출생한 김두봉은 다섯 살 적은 고향 후배인 최현배(울산 출신)를 주시경 문하로 인도했다. 그런 뒤 주시경 학파의 동기동창이 됐다. 위 논문에 따르면, 두 사람은 국어연구학회 산하의 강습소도 1911년에 함께 졸업했고, 국어연구학회의 후신인 배달말글몯움 산하의 조선어강습원도 1913년에 함께 수료했다.

1914년에 별세한 주시경을 계승한 제자는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출신의 교사 김두봉이다. 그는 주시경을 뒤이어 조선어강습원 고등과 강사가 됐다. 그러나 그는 주시경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서른 살 되던 해에 일어난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시위에 가담한 그는 경찰의 체포를 피해 다니다가 망명길에 오른다.

상하이로 간 김두봉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임시사료편찬위원이 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이 됐다. 그러나 임시정부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다음, 1924년에 한국인 학교인 인성학교의 교장이 되고 1929년에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했다. 뒤이어 1935년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1942년에 조선독립동맹 주석이 됐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해방 뒤에 조선신민당 위원장,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 북한 국가원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더니 1956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1958년에 숙청을 당했고 1960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의 이력은 그가 남한에서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는 데 제약이 되고 있다

김두봉의 중국 활동에서는 한글 연구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 이전의 김두봉은 외부 활동보다는 한글 연구에 더 많이 매진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포착된 김두봉은 독립운동하러 온 사람이기보다는 공부하러 온 사람이었다. 2018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71·72합본호에 실린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논문 '김두봉의 재중국 독립운동'은 "소설가였던 김광주가 상해에서 보았던 김두봉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골샌님이었는데, 이마에서는 노상 내 천(川)자를 그리고, 언제나 아래층 대청 한구석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서 어린아이 딱지장 같은 데다가 한글 어휘를 한마다씩 써가지고 한장 한장 들여다보며 말을 고르고 말을 다듬고 하는 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아나키스트 정화암도 김두봉을 독립투사보다는 '고루한 한글학자'로 평가했다. 다른 이들도 그를 훈장 타입으로 보면 봤지 독립투사로 보지는 않았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그런 시절인 1922년에 김두봉은 <깁더 조선말본>을 펴냈다. 조선어 문법을 깊게 심화시킨 이 책은 1948년에 북한이 채택한 조선어 신(新)철자법의 토대가 됐다. 내 천(川)자 주름살을 하고 땅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의 지루해 보이는 일과는 결과적으로 한글 독립운동이 됐다.

그런데 그가 샌님도 아니고 골샌님이라는 말을 들으며 연구에 매진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둔 것은 그 정도로 공부에 미쳤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 시절에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판단하에 연구·집필에 매진했다고 보는 게 이치적일 것 같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한글운동 지도자
 

1916년 김두봉이 편찬한 문법책 <조선말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처음 얼마간 임시정부와 함께했던 김두봉은 나중에는 임정을 멀리했다. 위 논문은 "임정 소재지 상해 그리고 중경에서 거의 20년을 살았지만 임정 근처에 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시절 그는 독립운동진영의 아웃사이더 비슷했다.

그러면서 공부에만 매진했던 그가 1930년대에 약산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의 주요 인물이 되고 1942년에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 됐다. 그러더니 해방 뒤에는 스탈린의 지원 같은 것 없이도 김일성과 거의 비슷한 위상을 차지했다. 1948년에 김구와 김규식이 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에 가서 벌인 남북협상이 4김 회담이 된 것은 북측 상대방이 김두봉과 김일성이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부근에 있을 때만 해도 아웃사이더로 비쳐졌다. 마흔이 다 되도록 지도자와는 거리가 먼 골샌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랬던 이가 지도자로 급부상하더니 해방 뒤에는 4김 회담의 주역이 됐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과 자신의 항일투쟁을 기반으로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제자라는 후광과 자신의 항일투쟁을 기반으로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주시경의 후광을 배경으로 김일성과 거의 비슷해졌다는 것은 김두봉이 실제로는 아웃사이더 체질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지도자 기질이 없었던 사람이 마흔 넘어 갑자기 지도자 스타일로 바뀌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동안 그가 아웃사이더로 비쳐졌던 것은 그 시절 그의 주변에 있었던 이들의 독립운동이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원봉 스타일의 독립운동이 '골샌님'의 체질에 더 맞았다고 봐야 이치에 맞다.

결과적으로 '골샌님'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중에도 골샌님처럼 한글 연구에 매진했다. 그런 뒤 해방 이후의 북한에서 한글운동의 지도자가 됐다. 위의 이준식 논문은 "주시경의 후계자, 독립동맹 주석 출신, 여기에 북한 정권의 2인자라는 위상이 더해시면서 김두봉은 자연스럽게 북한 언어정책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 뒤 "김두봉이 2인자로 있는 동안 김일성은 언어정책과 관련해 별도의 교시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문자정책에 관한 한 김두봉이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동문 최현배는 해방 뒤 미군정청 편수국장과 대한민국정부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어 한글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시기에 김두봉도 북한 국가권력을 활용해 한글운동을 벌였다. 문자 정책에 관한 한 주시경의 제자들이 남북을 다 석권한 셈이다. 김두봉이 고향 후배 최현배를 이끌고 주시경을 찾아가는 장면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얼마나 소중한 장면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남북으로 분단된 결과, 남과 북은 똑같이 한글 전용에 성공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래 한글이 가장 막강해진 것은 이때였다. 해방과 함께 민족이 분단되고 외국 군대들이 주둔하고 이남에서 친일파가 더 강해지는 상황에서도 유독 한글만큼은 진정한 해방을 맞이했다고 평해도 될 것이다.

이런 성과를 거두는 데 기여한 김두봉은 대한민국 국가보훈부가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하지만 세종대왕과 주시경 선생이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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