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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창립행사 장면.
▲ 신간회 창립행사 장면. 신간회 창립행사 장면.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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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후 춘암이 주도하는 천도교는 주요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을 주도한 민족주의 DNA가 여전히 동인(動因)으로 작동한 것이다. 춘암은 천도교 수장이라는 신분 때문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간부·아들·조카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조직된 최대규모의 항일운동 단체는 신간회(新幹會)이다. 3·1혁명 이후 국민의 뜨거운 항일열기로 각종 단체가 산발적으로 조직되었으나 일제의 탄압과 상호 연대 부족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27년 2월 15일 천도교와 민족주의좌파, 사회주의세력이 연합하여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합법적인 항일운동 단체로 신간회를 창립했다. 처음에는 신한회(新韓會)라는 명칭을 썼으나 등록과정에서 총독부가 한(韓) 자를 거부하여 같은 뜻의 간(幹) 자를 쓰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 국내의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의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이에 연합 또는 통합하라는 국민의 여론이 빗발치는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존속기간은 4년여에 불과했으나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와 해외 지회를 두었으며, 회원수만 2만~4만여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1926년 12월 천도교 구파의 권동진과 춘암의 양자 박래홍, 불교계 한용운, 언론계 박동완과 신석우, 사회주의 계열의 홍명희와 최일환 등의 혐의를 거쳐 태동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간회는 이듬해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홍명희와 간사 35명을 선출했다. 얼마 후 이상재의 사망으로 권동진이 회장에 선출되었다. 천도교측 인사로는 이종린과 박래홍이 중앙위원으로 선임되고, 이어 박래홍은 총무부 간사를 맡는 등 조직의 핵심으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있는 신간회 강령과 규약(복제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있는 신간회 강령과 규약(복제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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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발기인은 34명이었다. 중국 베이징에 있던 신채호도 홍명희의 서신 연락으로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는 이상재가 선임되었다. 다음은 신간회 발기인 명단이다.    신간회 발기인

권동진·김명동·김준연·김탁·문일평·박동완·박래홍·백관수·신석우·신채호·안재홍·유억겸·이갑성·이관용·이상재·이순탁·이승복·이승훈·이정·이정섭·이종린·이종목·장길상·장지영·정재룡·정태석·조만식·최신익·최원순·한기악·한용운·한원건·홍명희(가나다순)

신간회는 1927년 1월 19일 발기인 대회에서 3대 강령을 채택했다.

신간회 강령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일제는 전국단위 규모의 신간회 활동을 방치하지 않았다. 총독부가 추진한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기대했으나 조직과 활동이 반일주의로 기울자 분열 공작과 해체공작에 나섰다. 내부에서도 이념과 노선의 차이에 따라 차츰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신간회 간부들은 이를 민족·민중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같은 해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신간회 간부·회원 44명을 구속하면서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고 각 지회에서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신간회 - 지회의 해소론이 제기된 이유 중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① 신간회의 조직형태가 정당적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점이고, ② 강령이 추상적이며 구체적 투쟁지침이 없어 오히려 노동·농민운동을 말살시킨다는 것이며, ③ 객관적 정세가 급격히 변하였고 주체적 조건이 이에 조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도교는 신간회 운동의 조직과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홍보선전의 인쇄물 책임을 맡았다. 이로 인해 박래홍 암살이라는 큰 비극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박래홍은 인쇄를 위해 위장 하숙집을 얻는 등 악전고투 속에서 예정대로 인쇄를 무사히 마쳤다. 그는 인쇄물을 보관할 곳을 물색했다 <개벽>사의 수색으로 인해 인쇄물도 함께 발각되고 말아 대거 검거되는 비극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를 계기로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 뿐 아니라 청년동맹의 박래홍 대표위원 등 다수가 연행되고 많은 수의 요인들이 일제에 의해 처벌받아야 했다. 

즉 일제는 6월 6일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의 계획이 탄로되는 것과 함께 동시에 전국에서 천도교 인사들에 대한 검색·체포를 실시하고 나섰다. 그리고 6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에 집중적으로 전국의 천도교 기관 및 관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검색에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일경은 심지어 교인 명부와 청년회원 명부 등을 압수하면서 천도교인의 가택까지 수색하는 등 동태 파악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고 있었다. (주석 1)

신간회는 서울에 중앙본부를 두고 전국 각지와 일본 도쿄 등에 지회를 설치한데 이어 여러 가지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중앙본부의 주요 민족운동을 살펴본다.

 1. 민족협동조직의 확대운동
 2. 국외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에 대표 파견 시도
 3. 실제 운동 당면과제 6항목의 발표
 4. 전국순회 강연운동
 5. 수재민 구호운동
 6. 재만동포 옹호운동
 7. 어부들의 권익보호 활동
 8. 원산 총파업과 노동운동 지원
 9. 함남 수력발전소 매립지구 토지보상운동
 10. 단천 산림조합사건 지원운동 
 11. 갑산 화전민 방축사건 규탄운동
 12. 태평양문제연구회의 참가반대운동
 13. 언론·출판·집회·결사의 탄압규탄운동
 14. 밀러박사(세계기독교지도자) 연설회 개최
 15. 재일본 한국인노동자 송환항의운동
 16. 광주학생독립운동 옹호·지원활동
 17. 민중대회운동
 18. 장풍 탄광노동자의 노동운동 지원
 19. 사회 각 부문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원
 20. 학생부의 민족교육운동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한국과 일본에 산재한 크고 작은 사회단체와 사상단체들이 자진 해체하고 유사단체들끼리 통합하거나 신간회를 지지하고 산하 지회로 편입되었다. 신간회는 일종의 정당구실을 하였다. 1928년 12월 18일 도쿄지회에서 채택한 강령과 정책에서 신간회의 목표를 살필 수 있다.

 강령

 1. 우리는 조선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한다.
 2. 우리는 전민족의 총력을 집중하여 민족적 대표기관이 되기를 기한다.
 3. 우리는 모든 개량주의 운동을 배격하며 전민족적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한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창립되어 1920년대 후반 국내 민족운동의 중추적인 열할을 수행하다가 4년 3개월 만인 1931년 5월 16일 해체될 때까지 국내 민족협동전선의 최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국내의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동단결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이후 좌우협동과 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민족단일당 결성운동 등에 큰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신간회에서 천도교 구파는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을 이어갔다. 이는 전적으로 당시 교단을 대표하고 있던 박인호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다. 물론 신간회에 대한 박인호의 견해나  행동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없지만 중앙집권적 조직의 특성상 당시 구파를 대표하고 있던 박인호의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장로 권동진, 천도교회월보 발행인 이종린, 청년동맹 대표 박래홍, 청년동맹 집행위원 박완, 그리고 청년동맹 지육부장 이병헌 등 5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이병헌이 참가한 것은 신간회 창립자금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는 창립자금을 천도교 구파에서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주석 2)
  

주석
1> 임형진, 앞의 책, 212~213쪽.
2> 앞의 책, 21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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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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