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인근에 있는 박정희 동상. 높이가 5M에 이른다.
조정훈
넷째, 반민주, 독재.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무고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투옥, 고문한 것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고문 수법은 일제 강점기 때 악질 고등계 형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악마적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박정희 독재의 정점은 유신 독재와 그 치하에서 희생된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8인 중에는 도예종, 여정남 등 대구, 경북 사람들이 많다. 유신 독재 시절 한국의 인권 수준은 세계 최하위였고 박정희 독재는 국제적 지탄 대상이었다. 박정희의 반민주, 독재에 대해서는 워낙 문헌이 많아 여기서는 생략한다.
[#5] 반통일 민족 대결
다섯째, 반통일, 민족 대결. 박정희는 5.16 직후부터 통일세력을 적으로 삼아 대대적 검거 선풍이 불었고 그 뒤로도 통일세력을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철저히 탄압했다.
특히 5.16 뒤 박정희, 김종필의 통일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북에서 내려온 밀사 황태성(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자 결혼 중매인, 박상희의 사위가 김종필)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것은 큰 잘못이었다. 원래 밀사는 죽이지 않는다. 게다가 황태성은 자기 친형이나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이였다(황태성의 일생에 대해서는 김학민, <박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를 읽어보라).
그 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남북화해 제스처를 취하며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서 민족 과업인 통일을 수단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며 그 뒤 남북관계 악화의 빌미가 됐다.
[#6] 경제 살렸다는 거짓 신화
여섯째, 사람들은 박정희가 경제는 살렸다고 말하는데 이마저 허상이다. 홍준표 시장은 박정희가 5000년 가난을 극복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며 동상을 세우겠다고 하는데 이런 인식이야말로 문제다.
박정희 모델의 핵심은 만주국 모델이다. 1932~1945년 만주에 세워진 만주국은 명목상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수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국이었다.
만주국은 고성장을 달성했는데 만주국을 이끌던 5인방을 '니끼산스께'(2끼3스께)라고 부른다. 2명의 끼와 3명의 스께인데, 관동군 사령관 도조 히데끼(東條英機)가 있었고 경제정책을 주도한 사람은 기시 노부스께(岸信介)였다. 도조 히데끼는 전후 동경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으나 기시 노부스께는 운 좋게 살아남아 전후 자민당 총재와 총리를 지냈다. 그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다.
이들 극우파는 일본의 만주 점령과 조선 식민 통치를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 덕분에 만주, 조선이 발전했다고 강변한다. 그래서 지금도 과거사에 사과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일본에도 양심적인 인사들이 있지만 자민당 주류는 그것과 거리가 먼 뻔뻔스러운 극우파 인사들이다.
만주국의 고성장은 파쇼독재에 기반을 둔 총동원 체제에 의한 양적 성장이고, 이런 방식은 일시적으로는 고성장을 달성하는 경우가 많다.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비슷한 방식으로 고성장을 했다(박정희는 문경에서 교사 시절 하숙방에 나폴레옹과 히틀러 사진을 붙여 놓고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사람은 많이 죽였지만 난 놈은 난 놈이야." 박정희의 말이라는, 해방 후 박정희의 동거녀 이현란의 증언이다).
그러나 지금 독일, 이탈리아에서 히틀러, 무솔리니가 경제 살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독재 찬양을 듣고 살아야 하나. 파쇼 경제모델의 특징은 일시적 고성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독재 때문이다.
초기의 양적 성장은 쉽지만 어려운 것은 후기의 질적 성장이다. 질적 성장을 하려면 자유로운 토론, 비판이 필수적이다. 유신 독재 속에서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니 박정희 모델은 오래 못 갈 운명이었다. 어차피 경제적 실패로 박정희 체제가 무너졌을 것인데 그런 결과를 보기 전에 박정희가 죽는 바람에 아직도 많은 사람이 박정희 신화에 빠져 있다. 박정희가 경제 살렸다고 하는 건 거짓 신화일 뿐이다.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을 보수 쪽에서는 선견지명이 있다고 찬양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이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에 착공, 불과 2년 반 걸려 1970년 여름에 완공했다. 그래서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에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완공 후 몇 년간 통행량이 적어 도로가 텅텅 비었고, 농촌에서 고속도로에 고추를 널어 말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급조하는 바람에 왕복 4차선으로 너무 좁아 나중에 도로를 확장하는 데 원래 든 비용의 20배가량 들었다. 이런 게 무슨 선견지명인가?
2년 반 만에 끝낸 무리한 졸속, 부실 공사로 애꿎은 77명의 인부들이 사망해 금강 휴게소 부근에 77인 위령비가 서 있다. 박정희는 왜 이렇게 경부고속도로를 무리하게 서둘렀을까? 1971년 4월 대선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의 사고방식은 매사 이런 식이다.
[#7] 부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