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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인가? 바로 문제가 시작된 곳에서부터.

사람중심 진짜경제

한국의 교육은 늘 문제였다. 하지만 교육이 더욱더 문제가 된 것은 우리가 97년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부터였다. 심지어 명문대 졸업생들조차도 안정된 대기업체의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되면서 우리 사회의 입시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불행하게도 이 문제는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출발점이 심각한 양극화와  일자리 부족인 만큼 이 문제는 결국 경제의 성장을 통해서 해결할 수 밖에 없다. 경제가 곧 정치이고 경제가 교육인 시대이다.

하지만 단순히 대기업체 중심이거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성장은 그 답이 아니다. 양극화와 임금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경제성장은 오히려 현재의 입시경쟁을 더욱 확대시킬 뿐이다.

결국 양극화를 줄이면서 중간층을 육성하는 경제성장, 안정된 일자리를 늘리면서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경제성장이 그 해결책일 수밖에 없다. 경제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수준의 성공이 가능할 때,  각 개인이 타고난 다양한 능력을 다양하게 개발할 수 있는 교육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람중심 진짜경제’를 내세우는 문국현이 교육문제의 정답인 첫 번째 이유이다.

엘리트의 책임

한국의 교육은 늘 문제였다. 하지만 교육이 항상 문제였던 것은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그들이 누리는 혜택에 걸맞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한 편에서는 양극화가 세계적인 추세라고 당연히 여기는 전문가들이 있다.

사실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수록 그들이 누리는 부와 영화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그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한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엘리트가 엘리트로 대접 받기 위해서 필요한 요건은, 다른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전문성이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필요한 훈련들을 거친 전문가라면, 그만큼 더 노력하여 적어도 자신의 분야에서는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권위를 만들어 내야 한다. 에둘러 가는 길이 아니라 올곧게 가는 길을 택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존경을 스스로 얻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가장 중심적인 문제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서는 것이 전문가가 담당해야 할 첫 번째 의무이다.

두 번째는 책임성이다. 엘리트가, 그리고 전문가가 남들보다 더 나은 혜택을 누리는 것은 필요한 경우 더 많은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 먼저 나서서 자신을 희생하고, 공동체가 부여하는 의무를 남보다 앞서 수행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평범한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이 지도자인 것이다. 양극화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스스로 몸을 낮춰 소외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이 책임지는 사람의 자세이다.

어느 사회이거나, 어느 공동체이거나, 이끄는 사람들이 스스로 정당하지 못할 때 교육은 그 가치를 잃는다. 정당성을 잃은 엘리트 코스는 그것이 부정한 만큼 더 왜곡되기 마련이며,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상황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이 여전히 문제인 것은 지도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책임을 가장 먼저 지적하면서 부정부패 없는 나라를 주장하는 문국현이 정답인 두 번째 이유이다.

평생교육

한국의 교육은 늘 문제였다. 하지만 교육이, 그리고 시험이 항상 문제였던 것은 한 순간의 평가로 인해 일생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의 서열이 평생을 좌우하며, 졸업장에 적혀있는 학교와 학과가 그 이후의 이력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의 선택을 결정하고, 아이들의 미래까지 함께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누가 점수에 목매지 않겠는가? 어느 부모가 아이들의 사교육비를 마련하지 않겠는가?

유일한 해결책은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점을 다변화하고 대학 이후에도,  혹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신이 일하고 있는 현장에서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현재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누리고 있는 재교육과 재충전의 기회를 중소기업의 노동자에게도 확대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는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대학 4년의 교육을 받은 신참자 보다 5년 10년의 근무경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영역에서 필요한 개선책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음은 당연하다. 중소기업의 육성과 함께 이 기업의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입시에서의 경쟁을 실무에서의 경쟁으로 바꾸는 것이며 교육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해고의 유연성’을 진정한 ‘노동의 유연성’으로 바꿀 수 있게 한다. 산업구조의 변화나 재배치 과정에서 충분한 재교육의 기회를 갖는 것은 노동자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기업의 입장에서도 노동자들의 기존경험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물론 일자리의 수가 얼마나 풍부한가가 궁극적인 문제이겠지만, 한 순간의 경쟁에 패배한 사람에게도 또 다른 도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기회가 한번밖에 없을 때, 사람들이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인생에 또 다른 도전이 허용될 때, 새로운 출발이 가능한 것이다.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문국현이 교육문제의 정답인 세 번째 이유이다.

상생 공동체의 복원

한국의 교육은 늘 문제였다. 하지만 교육이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사회의 공동체가 갈수록 허물어져 가기 때문이다.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보육과 육아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의 것이 되었다. 낮은 출산율은 아이들을 귀하게 만들었고, 그 귀한 아이들이 잘 되는 것이 부모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당연히 내 아이가 잘 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고 명문대에 가는 것이 잘 되는 길이라면, 어느 부모가 어떤 고생인들  감수하지 않겠는가?

사실 지금 우리 사회가 들이는 사교육비의 절반만 공교육으로 돌리더라도 교육여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문제는 그  돈이 ‘내’ 아이가 아니라 ‘남의’ 아이에게 가는 것이고, 특히 사교육비를 넉넉하게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처럼 경쟁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돈은 곧 성적이고 성적은 다시 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내 아이가 잘 되는 길인가? 흥미롭게도 지금 내가 보는 19세기 프랑스 교육통계는 각 지역의 학교 수와 치안사건의 발생 수를 나란히 적고 있다. 당연히 가난한 지역에 학교가 적고 범죄가 많다. 교육투자를 아끼는 것은 결국 치안에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이고, 사교육비의 증가는 다시 개인적으로 보안에 쓰는 비용을 늘린다.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사회 적 비용은 더 많이 증가하는 것이다.

차라리 ‘내’ 아이를 ‘우리’ 아이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떤가?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고 뒤처지는 사람이 있다. 뛰어난 사람이 뒤처지는 사람을 보살필 때 그 사람이 존경 받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그 부유함이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지도자가 책임을 지고 이끌며, 평범한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할 때,  모두가 떳떳하지 않겠는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싸우는 대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때에 비로소 학교가 학교가  되고 교육이 교육이 되지 않겠는가?

상생의 공동체를 말하는 문국현이 교육문제의 정답인 마지막 이유이다.

교육이 문제다. 맞다. 그러나 그 답은 교육 안에 없다. 교육이 문제다. 맞다. 그러나 마법의 지팡이는 없다. 내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먼저 바뀌지 않으면, 교육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아이들의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보다도 먼저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는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21세기를 다시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번에 쓴 글로 ‘파리유학생’이 되어버린 김정인입니다. 이제는 더 빼낼 시간이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이 글은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제까지 먹은 밥값은 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참고로 저는, 비록 아직도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지 못한 학생의 신분이지만, 10년이 훨씬 넘도록 프랑스 교육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처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홍세화 선생님의 ‘대학평준화’를 주장하는 칼럼을 읽고 난 후였는데 아무래도 바로잡을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미적거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마침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께서 교육관련 공약을 발표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몇 마디는 거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입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6개의 글로 짧게 나누어 하루에 2편씩 사흘동안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다음은 각 편의 제목입니다.

1. 교육이 문제다?
2. 이해찬의 함께 켜져 있는 양쪽 깜박이
3. 홍세화의 프랑스식 모델, 대학평준화?
4. 이명박의 미국식 모델, 자율형 사립고?
5. 토론을 위한 전제들
6. 교육문제, 문국현이 정답이다

본문에서는 편의상 존칭을 생략하였습니다.



#문국현#이해찬#홍세화#이명박#교육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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