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개막식에서 소개된 지젤 알리미 동상
MBC 유튜브 캡처
"나는 정의가 아닌 것을 참을 수 없어요."
알리미는 사망 1년 전 <르 몽드>와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이같이 요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90년 남짓한 그의 삶은 '참지 않는 삶'이었다. 저서 <여성의 대의>에 따르면 1927년 7월 27일, 프랑스 식민지 튀니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남녀 간 차별에 민감했다. 그는 열세 살 때 단식 투쟁 끝에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오롯이 혼자 힘으로 튀니지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고, 1944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팡테옹소르본대학교에서 법학 및 철학 학위를 받았다. 1949년 변호사에 임용됐다.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은 1972년 성폭행으로 임신중단을 한 미성년자가 낙태 혐의로 기소된 '보비니 재판'에서 피고의 무죄를 이끌어낸 일이다. 고등학생이던 마리 클레르와 그의 어머니 및 동료, 낙태 시술을 한 일반인 등 총 5명이 피고인으로 기소됐다.
당시 형법에 의하면 임신중지를 한 여성은 최소 6월에서 2년, 임신중지를 시킨 사람은 최소 1년에서 5년까지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었다. 알리미는 피고인들의 동의 하에 보비니 재판을 낙태금지법 자체를 심판하는 '정치 재판'으로 만들었다.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유전학의 권위자 자크 모노 교수를 설득해 증인으로 내세우고,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시위를 벌였다. 마리 클레르의 어머니인 미셸 슈발리에는 법정에서 당당히 외쳤다. "재판장님, 저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는 것은 재판장님의 그 법입니다!"
그 결과 마리 클레르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어머니 슈발리에는 벌금 500프랑에 집행유예를, 그의 두 동료는 석방됐으며, 시술 당사자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이 적용됐다. 그 자신도 임신중지 당사자였던 알리미는 사회가 임신중지권을 박탈해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를 체감했기에, 누구보다도 이 재판의 함의를 잘 알았다. 그는 보비니 재판을 두고 "여성의 자유에 대한 확인 즉, 자기결정권 및 피임과 낙태에 대한 여성의 권리에 대한 확인"이라고 풀이했다. 이 재판이 1975년 베유법 통과의 초석이 됐음을 말할 것도 없다.
남녀 동수 후보의 발판을 마련하다
1981년 국회의원이 된 그는 선거 여성 할당제 법제화에 앞장선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정치 참여율이 낮은 현실에 의문을 품는다. 공저로 참여한 책 <페미니즘과 섹시즘>에서 알리미는 '남성은 공공, 여성은 사적인 영역'으로 나뉘는 성 역할 분리가 여전하다고 지적하며, "영구히 남성이 제시하고 결정하며, 여성이 재현하고 동의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1982년 10월, 프랑스 의회는 알리미의 발의에 따라 "후보자 목록에서 같은 성별이 75% 이상 포함될 수 없다"는 '여성할당제' 수정안을 표결했다. 당시 얻어낸 '25%'는 남녀 동수까지 확대하기 위한 작은 발판이었는데, 이후 프랑스는 2000년 '파리떼(Parité)'법을 통해 후보 절반을 반드시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했다. 지역구 후보 3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한 권고 규정은 외면받고, 할당제 의무화 논의는 번번이 백래시에 직면하며, '역대 최다'라는 여성 국회의원 당선인 비율이 20%에 불과한 한국으로서는 아직 멀고 먼 일이다.
페미니스트를 기려야 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