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0 17:01최종 업데이트 24.06.2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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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브라질 상파울루 파울리스타 대로에서 시민들이 '낙태 불법화 법안'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는 유럽의 동갑내기 국가 지도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공동성명에 이를 명시하는 문제로 부딪혔다. 프랑스는 지난 3월 세계 최초로 헌법에 '낙태할 자유'를 명시한 나라다. 이탈리아의 멜로니 총리는 강경 우파 성향으로 '기독교의 어머니'를 자처하며 임신중지 권리에 완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다.

미국에서도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임신중지권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임신중지권 보호를 공약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 각 주에 판단을 맡긴다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맞선다. 2022년 6월 보수 우위의 미연방 대법원이 보편적 임신중지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이후로 여러 주에서 찬반 다툼이 벌어지는 중이다. 지난해 1월부터 15개월간 미국에서 다른 주로 원정 임신중지를 선택한 산모만 17만명이 넘는다.(구태마허 연구소 자료)


브라질에서는 임신 22주 이후 임신중절을 살인죄와 동일시 하는 법 개정안이 하원에 상정돼 여성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개정안 통과 시 성폭행 피해자가 임신중절을 하는 경우에도 성폭행범보다 더 높은 형량을 받을 수 있다. 성난 여성들은 각기 피켓을 들었다. "소녀는 엄마가 아니다", "강간범은 아빠가 아니다".

한국에선 잊힌 임신중지 논의

해외에서는 국가 간 외교전으로 비화될 만큼 '임신중지 논란'이 뜨거운데 한국은 비교적 잠잠하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며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후, 2020년 12월 31일까지 형법을 개정할 것을 국회에 요청했지만 후속 입법에 실패하면서 임신중지를 한 여성과 의료진을 형사처벌하도록 한 낙태죄 조항은 자동 폐기됐다.

당시 정치권이 택한 전략은 임신중지 의제에 대한 '방기와 침묵'이었다. 박동열·김경희·김현아(2023)는 2020년 21대 총선에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인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임신중지권과 여성 건강권을 보장하는) 낙태죄의 대체입법을 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회구조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역구 여론, 특히나 종교계를 의식해 개별 의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사안으로 인식돼 제대로 된 논의 없이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낙태죄 형사처벌 조항은 폐기 수순을 밟았다.

22대 총선에서도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논의는 아예 없었다. 성평등 어젠다가 사라진 선거 국면에서 관련 공약을 내놓은 곳은 녹색정의당 한 곳뿐이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등 거대 양당을 비롯한 나머지 9개 정당의 공약집에서는 관련 공약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는 오직 심판론만 가동될 뿐 정책이 사라진 총선의 특성에 더해 '백래시'로 인해 성평등 이슈는 언급조차 안 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방기되고 있는 여성의 건강권
 

2023년 12월 15일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안전한 임신중지약(미프진) 도입과 모자보건법 개정을 가로막는 보건복지부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문제는 이 사이 여성의 건강권이 방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후속 입법의 미비는 식품의약품안전처나 보건복지부가 유산유도제 도입, 건강 보험 상에 인공 임신 중절을 포함하는 일 등을 미루는 좋은 빌미가 된다. 임신중절에 대한 정보나 상담 창구가 부재한 것은 물론, 병원마다 시술 가격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다. 여기에 더해 성폭행 피해자나 청소년, 장애 여성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입법 공백이 더욱 가혹하게 작동한다.

지난 14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가 연 토론회에서 쏟아진 고충들은 여기에 기인한다. 낙태죄가 법적 효력을 잃었음에도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거나, 상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병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성폭행 피해자들도 임신중단 수술을 시행할 병원을 찾지 못해 지원 기관들이 인근 병원에 일일이 전화를 돌리고, 인맥을 동원해 겨우 의사를 설득해 수술하는 일이 빚어진다. 성폭행 피해자들에 대해 임신중단 의료비 지원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의사가 기록 남기기를 거부해 의료비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토론회에 참석한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낙태죄와 관련한 입법의 '공백'은 첨예한 의견 대립으로 인한 결정 실패가 아니라, 처벌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여성들 요구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라며 "임신중단 비범죄화에 따른 임신중단 의료 정상화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후속 입법 미비는 국가와 정치권의 방기로 빚어진 일이지만, 헌법불합치 결정으로부터 시작된 낙태죄 비범죄화는 여성들의 끊임없는 저항이 얻어낸 성과다. 김 부연구위원의 발언은 임신중지권 논의는 한국에서 더 이상은 '대립'의 문제가 아니며, 실질적 방안 마련이라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고언이다.

정부와 민주당에 촉구한다
 

2023년 4월 9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낙태죄 폐지 2주년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국가는 여성의 몸에 차별적으로 관심을 둔다. 여성에게 출산하라는 압박은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한편,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에 대해서는 5년 넘게 '나 몰라라' 한다. 낙태죄 폐지 이후의 후속 입법은 여성의 건강권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의료 접근권과 이어지는 평등권에 관한 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또한 정부에 안전한 임신중지와 관련 서비스에 관한 포괄적인 체계를 마련하고 임신중지의 건강보험 적용을 권고했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에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를 적극적으로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정부도 정부지만, 거대 야당인 민주당에 더욱 촉구한다. 낙태죄 폐지 후속 입법은 21대 국회에서 보듯 개별 의원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당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후속 입법을 당 차원에서 발의하고 밀어붙여야 한다. 애초에 '낙태죄 헌법불합치'는 민주당이 집권당일 당시 내려진 결정이었으며, 그 후속 조치도 문재인 정부와 '여대야소' 국면의 다수당이었던 민주당의 몫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중차대한 일을 민주당은 5년 이상 방기했다. 여성들의 재생산권과 건강권을 방기한 일의 무게를 깨닫고, 책임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 총선에서 '2030 여성들'이 민주당에 보낸 압도적 지지에 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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