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미
맛있게 먹었다고 잘 표현했다면 죄책감이 덜했을까. 고백하자면,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를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이 책을 쓴 이순자를 문학인으로 기억하자는 다짐이었다. 책이 출간된 2022년 생각이다. 당시 나는 '엄마'라는 정체성은 그의 업을 나열할 때 뒤편으로 이해하려 했다. 결혼 뒤 이뤄진 그의 노동 기록을 의식적으로 부차적인 무언으로 보려 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예순에 접어든 여성이 일자리를 얻고자 동분서주한 경험을 핍진하게 담은 글 '실버 취준생 분투기'(2021)는 몇 해 전 SNS에서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되는 쾌거까지 거둔 분투기가 한 챕터로 들어간 이 책은 마트 청소, 요양보호, 장애인 활동지원 등을 해온 작가의 삶과 노동의 기록을 곡진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공모전에 당선된 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문장은 지금도 쉼 없이 읽히고 있다.
최근 이 책을 재독했다. 완독 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가 수화기 너머 지켰던 침묵의 색채를 찬찬히 더듬는 기분이랄까.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장면들이 비로소 눈가에 맺혀 펼쳐졌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와닿았던 장면들부터 복기해본다.
작가가 명동성당에서 운동권 동지들과 투쟁하고 봉사를 다니던 청년 시절, 시티즌 주식회사 근무 당시 여공들의 주말 수당을 갈취하는 관리자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 했던 일, 쉰넷에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시(詩)는 이야기"임을 뜨겁게 배웠던 일, "여그서 같이 살어라." 간청하는 이웃 할머니의 곁이 되어 준 날들, 기초생활수급자로 원룸 다리미판에 노트북을 놓고 글을 쓰던 나날들. 작가로서의 긍지.
두 번째로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모르게 지나쳤던 작가의 한 시절이 선명해졌다. 그 시절을 드러내는 첫 문장은 "남편과 결혼해 25년을 정말 열심히 살았다."
작가 이순자는 이혼을 끝으로 며느리의 세월을 통과했다. 그는 그 세월을 아프게만 보지 않았다.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동생을 모시고" 기꺼이 살아냈으며, "명절이면 100명 가까운 손님을 혼자 감당"했다.
시절을 회고한 문장 사이사이 '종갓집 맏며느리'의 과업을 수행해냈다는 보람이 배어 있었다. 청춘의 땀과 돌봄의 성취가 맺혀 있었다. 손님이 들이닥친 날, 요리 준비로 분주했을 '칼잡이 새댁'의 근육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 힘줄들은 따뜻하고, 역동적이고, 화려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갓 시집온 새댁이 수돗가에 앉아 그 많은 닭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싶다. 그래도 그 맛은 장작과 가마솥, 집에서 만든 간장, 그리고 오직 맛있게 해야겠다는 장손 며느리의 책임감과 지금은 맛볼 수 없는,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닭의 육질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순자,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중에서
화려한 칼잡이 실력만큼 작가의 정체성은 책에 담긴 이야기 속에서 여러 개의 이름으로 빛난다. 혹자는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를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겪은 경험의 총합으로 부를 수도 있겠다. 과연 그러한지 조심스레 따져볼 일이다.
유복녀로 태어나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자라났던 식구 많은 가난한 가정의 여성, 병원 진료 갈 때마다 의사의 말을 정확히 듣기 위해 필담을 요구했지만 수시로 거절당한 청각장애인. 식모를 부리던 버릇이 남은 이로부터 고초를 당하기도 했던 시니어 근로자. 독거노인과 장애인, 아이를 돌보던 요양보호사. 그리고 무용함이 세계를 구원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시심(詩心)으로 창작을 이어 나갔던 시인.
정체성들을 하나하나 모아 보니, 소외된 이웃이라는 기표가 가진 효능이 그에게 중요하지 않겠다는 예감이 든다. 한 마디 더 보태자면, 예순을 넘긴 대다수 여성 어른들이 흔히 요양보호사로, 청소 노동자로 살아간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그들 대다수가 일찍이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여의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의 양가 어머니, 할머니, 이모 들은 자신이 소수자라고, 삶이 진창이었다고 함부로 평한 바 없다. '언니'들은 떳떳했다. 그래서 작가 이순자의 삶은 내게 차라리 '보편'에 가까웠다.
그래서 고쳐 써본다. 그는 다만 '이순자'였다. 그는 어쩌면 여러 정체성 중에서 고유명사인 이름으로 가장 불리고 싶어했다. 그가 책 서두에 쓴 것처럼 식구와 부대끼는 갈등 속에서 청년 시절엔 숱하게 양보했지만 예순을 넘겨서는 할 말 다하는, 작가의 문장을 빌려 보자면 "나는 여전히 나였다."
스스로를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경계인'이라고 여긴 그는 힘든 이웃의 곁을 지키는 데 도가 튼 사람이 되어 갔다. 아파본 만큼 타인의 고통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그는 천사도, 무엇도 아닌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었다. 이 책은 자신을 오롯하게 완성하기 위해 그가 출렁이며 기록한 작업물이자, 생의 철칙이다.
"밤이 이슥해져 사위가 고요한 시간, 아픈 사람들은 내게 전화를 건다. 나는 창에 기대 전화를 받으며 나를 필요로 하는 이의 벽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무리 피곤해도 절대 먼저 전화를 끊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우리가 서로의 등에 기대고 있는 걸 아니까. 하나가 등을 떼면 벽이 무너지니까."
- 이순자,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60대의 시선으로 본 불공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