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봄알람
가정에서 살 빼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고 마른 몸매, 높은 학력, 갈고 닦은 인성을 숙제처럼 수행한 다음 여성들은 입사한 직장에서 '남성 연대'가 난무하는 서열 문화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저자는 이 같은 일터의 문화를 가리켜 '남성동성사회'라 말하는데, 이때 남성들은 "여성이 사회적 권력이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여성의 평가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다.
남성동성사회에서 여성을 조롱하는 문화를 습득한 후배 남성 직원은 똑같이 여성을 희롱함으로써 남성 집단 내 결속감을 다진다. 그렇지 않은 남성도 있기 마련이지만, 이 울타리를 넘기 위해 여성은 '털털하고 호쾌한' 특유의 정체성을 만들어냄으로써 남성 동료들과 어울리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경우가 허다하다. 생존 전략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드라마 혹은 여타의 영화에서 위풍당당하게 성희롱 사건을 폭로하거나 일상적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여성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실제 일터에서 여성들은 남성동성사회에서 성평등을 해치는 이슈가 생기더라도 싸우는 일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돈벌이하는 삶에서 그들과 결속감을 단번에 깨트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강한 여자' 이미지를 내세운 콘텐츠들이 불편했던 건 그것이 현실과 유리되어 지나친 판타지로 보이거나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또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여자는 '전사'까지 돼야 한다. 더구나 고민 끝에 싸우겠다는 용기를 내 피해자로서 폭로하거나 내부고발자로서 연대하는 여성이 인내해온 시간을 대다수 남성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낯설어한다.
저자는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 즉 여성에게 돌리는 현실에 있음을 주목한다. '훌륭한 기혼남성'이 리더로서의 고독을 드러내거나 결정권자로서 느끼는 부담을 털어놓으며 여성에게 접근하는 행태 또한 고착화된 성폭행의 패턴임을 지적한다.
편견을 넘으면 보이는 우리
매번 '여지를 준'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 구조망에 문제가 있음을 고하는 저자는, 책의 끄트머리에 힘주어 말한다. 젠더 다양성을 여성과 남성이 갖는 몫, 숫자의 문제로만 환원하지 말자고.
일터에 만연한 집단주의, 성차별 등을 복제하는 일에 똑같이 동참하지 말자는 그의 당부는, 이따금 'OO은 남자라서 그렇게 단순 무식하게, 타인의 기분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구나' 지레짐작하곤 했던 나의 내면화된 젠더 의식을 일깨웠다.
그 생각 역시 남성을 특정화 하며 동시에 여성이 자신에게 오는 날 선 말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데 일조하는 편협한 버릇일 수 있다는 걸 이 책은 알려 주었다.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는 여자라서, 남자라서 흔히들 그럴 거라는 고착화된 편견의 기저를 쉬운 문장으로 탐험하게 하는 페미니즘 입문서다.
딸에게 정기적으로 다이어트를 요구한 경험이 있는 양육자, 비빌 언덕이 없는 저경력 여성 후배들이 무리를 이뤄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객관화하며 버텨 온 사정을 예상해 본 적 없는 중간 관리자들이 이 책을 읽어 보길 권한다. '드센 여자가 너무 많아 탈'이라는 볼멘소리가 익숙한 일상에서, 고도로 세밀해진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녹초가 되어가는 여성들의 하루가 선명하게 펼쳐질 것이다.
특히 최고 관리자급에 종사하는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이 책을 읽어 봤으면 좋겠다. 쉽게 펼칠 리 없겠지만, 갖은 미션을 수행해 내면서도 '무해한 존재'로 조직에서 군림하지 않는 혹은 너무나 막강하게 군림해 온 여성 근로자의 생애와 부담을 조금아나마 파악하고 싶다면 말이다. 읽는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우리는 거리에서 '광년'이 될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우울증 '환자'가 됐다. (중략) 내면화된 성취와 성공에 대한 요구는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자기 착취로 이어졌다."
- <일할 자격>(희정) 중에서
출근 직전부터 오늘 할 업무와 귀가해서 할 일(자녀가 있는 친구의 경우, 원래보다 대략 3배의 할 일이 더해진다)을 떠올리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 일과를 부던히 해내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광년'이 되다시피 한 친구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어주는 소수의 남성 친구들과 이 책을 연말에 재독하고 싶다.
함께 '일'이라는 걸 잘해 보고 싶어서 동료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용기만큼, 성별을 막론한 '직딩'의 불안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당신 옆에 그녀와 그가 이 공간을 버터 내느라 내쉬는 숨은 같은 공간에 스민다. 우리는, 같은 동심원 안에 있다.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 한국 2060 여성들의 일 경험과 모험
김현미 (지은이), 봄알람(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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