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11 11:56최종 업데이트 24.08.1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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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오전 9시 마포형무소 앞에서 해방을 기뻐하는 사람들위키미디어 공용
 
8·15 해방을 기분 좋게 맞이한 친일파도 있다.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해방이 명확히 '대박'이었다. 그런 판단으로 해방 다음 날 지금의 한국프레스센터 주변에 나타났다. 그는 전직 일간지 기자였다. 그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언론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0년 8월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된 이래,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하나였다. 그래서 매일신보사에 들어가지 않는 한, 식민지 한국 안에서 한국어로 일간지 기사를 쓸 기회는 없었다. 정진석 한국외대 교수가 1995년 1월 <신문과 방송>에 기고한 '해방언론 50년사' 제1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에서 일간신문을 인쇄할 수 있는 시설을 제대로 갖춘 곳은 매일신보사를 비롯하여 일인들이 발간하던 일어신문인 경성일보와 조선신문, 그리고 인쇄소로는 근택인쇄소 등이 있을 정도였다. (중략) 우리말 단행본을 인쇄할 수 있는 시설을 가진 곳도 서울에서는 한성도서, 협진, 서울일신, 수영사, 대동, 청구, 고려 등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5년간의 그 같은 암흑이 걷히고 1945년 8월 15일 새벽이 됐다. 그러자 언론인들은 업계를 복구하기 위해 신속히 행동했다. 위 기고문은 "45년 8월 15일부터 이 해 말까지 40종을 넘는 신문이 새로 창간되었다"고 설명한다. 언론인 일부는 해방 이튿날 지금의 프레스센터 주변에 나타났다. 매일신보사를 접수하기 위해서였다. 정신이 멀쩡한 위 친일파도 그 대열에 섞여 있었다.

이들은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사람들이었다. 2010년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3권에 실린 김동선 국가보훈처 연구원의 논문 '해방 직후 <매일신보>의 성격 변화와 <서울신문>의 창간'은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배경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우선적으로 신문을 장악하는 일에 착수했다"라며 "건준은 8월 16일 매일신보사의 접수를 기도"했다고 말한다.

이 작업을 주도한 인물은 뜻밖에도 위 친일파다. 친일파 양재하가 총독부 기관지의 접수를 이끌었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양재하 편은 해방 직후에 그가 "건국준비위원회 신문위원에 위촉되었다"라며 "<매일신보>의 인쇄 시설을 접수하여 <해방일보> 창간을 시도"했다고 기술한다.

일본 해군 되어 희생할 것을 촉구

양재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했던 친일파다. 찬양도 그냥 찬양이 아니라 꽤 고약한 찬양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게 1943년 6월호 <춘추>에 쓴 '조선인과 바다'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일본 군사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가 1942년에 저술한 <조선역 수군사(朝鮮役水軍史)>를 언급했다. 일본인들이 조선역으로 지칭하는 임진왜란에 관한 이 책은 충무공 이순신을 군인정신이 없는 수준 낮은 인물로 평가했다.

이 책을 다룬 김준배 해사 교수의 논문 '아리마 세이호의 <조선역 수군사>(1942)에 보이는 이순신 비판론'(2020년, <군사> 제114호)에 따르면, 아리마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원 요청을 '조정의 승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을 두고 "우리 군인 정신에 비추어 논해보면 언어도단"이라고 평했다. 아리마는 이순신을 언어도단적 인물로 혹평하면서, 해전이 임진왜란 승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말로써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평가절하했다.

'조선인과 바다'에서 양재하는 이 책을 한 달 전에 읽었다면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9권에 인용된 '조선인과 바다'에 따르면, 그는 "그때부터 제국이 대륙 진출에 경륜을 가지고 오늘 해군 건설에 여러 가지 교훈을 얻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양재하가 자신의 나라처럼 언급한 '제국'은 이순신의 나라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나라다. 그때부터 제국이 대륙 진출에 경륜을 갖게 되고 이것이 지금의 해군 건설에 토대가 됐다는 느낌을 독후감처럼 내놓은 것이다. 그의 내면에서는 이순신이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꽤 고약한 방법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이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암시했던 것이다.

양재하는 그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성장한 "제국해군의 일원"이 될 자격이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한국인들의 일본군 입대를 부추기는 글이었던 것이다. 그는 "대장부는 말가죽으로 주검이 싸여야 한다(大丈夫當以馬革褱屍)"는 글귀를 거론하면서 일본 해군이 되어 희생할 것을 촉구했다.

"옛말에 대장부당이마혁회시(大丈夫當以馬革褱屍)라는 말이 있다. 대장부 마땅히 말가죽으로써 시체를 싼다. 즉 전장에서 토사(討死)할 것이지 아녀자를 옆에 놓고 약사발을 들고 최후를 마치는 것은 장부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부는 모름지기 마혁회시도 좋지마는, 그보다 사람은 반드시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할 일이다."

전투하다 쓰러져 말가죽에 싸여 매장되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바닷물에 빠져 죽는 게 좋다는 말이었다. 일본 해군이 되어 바다에서 희생할 것을 부추긴 것이다. 아녀자를 옆에 놓고 약사발을 들고 최후를 마치는 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병상에 누워 보살핌을 받기보다는, 그냥 바다에서 목숨을 다하라고 선동했던 것이다.

대중의 목숨을 매우 하찮게 여기는 인성의 소유자였다. 극우파 성향을 가진 악질 친일파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인물이 해방 다음날 매일신보사를 접수하고자 지금의 이순신 장군 동상 근처에 나타났던 것이다.

친일이 실직을 벗어나는 방편

양재하의 접수 시도는 실패했다. 건준이 뒤에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의 반발로 실패했다"고 말한다. 일본군 덕분에 시설을 지킨 매일신보사는 김구와 김규식이 중국에서 귀국한 그해 11월 23일부터 <서울신문>을 찍어내게 됐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듬해인 1906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한 양재하는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중학교급)와 경성법학전문학교(고교급)를 졸업한 뒤 1930년부터 기자 생활을 했다. 이 해에 조선일보사에 들어갔다가 3년 뒤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40년 8월에 폐간되기까지 동아일보사에서 기자와 논설위원을 지냈다.

그가 친일파로 부각된 것은 그 뒤였다. <동아일보>가 폐간돼 실직자가 된 이후에 노골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실직 뒤에 그는 월간지 <춘추>를 창간했다. 1941년 2월부터 이 월간지를 운영하면서 갖가지 친일 논설을 발표했다. 침략전쟁 시기라 친일을 하지 않고는 월간지를 운영할 수 없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월간지를 창간했다. 친일이 실직을 벗어나는 방편이 됐던 것이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에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편찬한 <친일파 군상>은 양재하가 발행한 <춘추>에 관해 "적극적 친일은 피한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은 '전쟁협력, 내선일체화 운동의 잡지'가 되고 말았다"고 평했다. 이런 잡지를 1944년 10월까지 발행했다. 생활 자금이 <춘추>에서 나왔다 해도 친일 논설을 실어 잡지를 운영했으니, 그 기간의 생활은 친일재산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았던 그가 점령군이 되어 매일신보사에 밀고 들어갔다. 중도좌파 그룹인 여운형 라인에 줄을 선 결과였다. 매일신보사 점령에 실패한 뒤 <신조선보>를 창간하고 <한성일보>를 발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는 해방정국하에서 언론인의 위상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 때 무소속으로 경북 문경에서 당선됐다. 26일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통에 납북됐다. 북으로 간 뒤인 1956년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이 됐다. 8·15 해방을 기분 좋게 맞이한 이 친일파는 60세가 된 1966년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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