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화림. 영화 <파묘>의 주인공 이름 '이화림'은 그에게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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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치의 디자인은 이봉창의 머리에서 나왔다. 하지만 제작자는 그가 아니었다. 김구도 당연히 아니었다. 역사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이 "3년간 김구의 수행비서였던 여성 이화림"이라며 언급한 이화림(1905~1999)이 바로 그 제작자다. 본인의 구술을 토대로 2015년에 출간된 <이화림 회고록>이 그때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회고록에 따르면, 55세의 김구와 30세의 이봉창과 26세의 이화림이 히로히토 처단 방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폭탄을 들고 갈 것인가의 문제인데 무척 쉽지가 않구나"라는 한탄이 김구에게서 나왔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가 폐기된 뒤 이봉창이 손가락으로 자기 몸을 가리키며 "폭탄을 바짓가랑이 주머니에 넣고 꿰매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두 남자와 함께 있다가 이 상황에 맞닥트린 이화림은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를 향해 김구는 "그거 좋은 방법"이라며 "그렇게 만들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이봉창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구체적인 디자인을 설명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천 조각을 사서 밤새워 이봉창이 말한 양식으로 바짓가랑이 주머니를 만들었다"고 이화림은 회고했다. 이 주머니들은 다음날 김구에게 전달됐고, "이봉창도 매우 만족"했다는 이야기가 김구를 통해 이화림에게 전해졌다. 이봉창은 그 주머니로 도쿄까지 수류탄을 실어날라서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앞에 나섰다.
31세가 된 이봉창이 도쿄에서 의거를 일으킨 데 이어,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24세의 윤봉길이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 의사를 재차 표시했다. 김구가 기획하고 준비한 이 두 의거는 그가 국제적 인물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1920년대 중반 이후로 침체됐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 1월 28일 상하이사변을 도발해 이 도시를 점령했다. 그런 뒤 전승 축하식 겸 천장절(일왕 생일)을 4월 29일 훙커우공원에서 거행하려 했다. 이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응징한 것이 윤봉길 의거였다. 이화림은 이 의거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회고록은 이렇게 말한다.
"윤봉길과 나는 미리 훙커우공원에 가 한번 정탐을 하고 구체적인 노선과 일군의 검열 지점 등을 찾아보았다. 동시에,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사진과 일장기 한 장을 샀다."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직후에 윤봉길은 자신을 향해 떼 지어 달려오는 헌병들에게 붙들린 상태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얻어맞았다. 김구가 세운 애초 계획은 이화림이 준비 단계뿐 아니라 이 단계에서도 윤봉길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화림과 윤봉길이 부부로 위장해 현장에 진입해 폭탄을 던지는 것이 김구의 원래 구상이었다.
1991년 12월 7일 자 <조선일보> 13면의 이화림 특집은 "사전에 김구 선생으로부터 윤 의사와 부부 사이로 위장해 현장에 접근하도록 지시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이 계획대로 실행돼 윤봉길이 만세를 외칠 때 이화림도 그 옆에 있었다면, 역사적인 이 사건의 명칭은 윤봉길·이화림 의거로 알려지게 됐을 것이다.
그런데 거사 직전, 김구의 생각이 바뀌었다. 위 기사는 김구가 "두 사람을 모두 잃을 수는 없다"며 윤봉길만 훙커우공원에 보냈다고 설명한다.
회고록에서 이화림은 4월 29일 이전의 몇 날 동안 밤잠을 설쳤노라고 말했다. 너무나 설렜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상하이에 와서 보아왔던 많은 애국지사의 영웅적인 업적은 나를 매우 고무시켰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자료를 본 이후 나는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며 반복해서 생각을 했다. 만일 내가 일본의 중요 우두머리를 사살할 기회를 갖는다면 정말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기회가 지금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의 꿈이 이제 곧 실현될 것 같아 매우 흥분되었다."
위 기사와 회고록에서 나타나듯이 우리가 윤봉길 의거로 알고 있는 사건은 원래 이화림·윤봉길 의거였다. 그랬던 것이 거사 직전에 김구의 작전 변경에 따라 윤봉길 단독 의거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화림은 왜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