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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몇 달은 살고 싶은 곳

시골 아낙의 폭넓은 치마폭 같은 스페인의 피레네 기슭

등록 2024.10.20 11:21수정 2024.10.2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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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500m의 페드라포르카(Pedraforca) 큰 바윗덩이가 두 개로 쪼개진 것처럼 보이는 페드라포르카는 카탈로니아에서 가장 상징적인 산으로 하이킹과 등반으로 인기 있는 곳이다.
해발 2,500m의 페드라포르카(Pedraforca)큰 바윗덩이가 두 개로 쪼개진 것처럼 보이는 페드라포르카는 카탈로니아에서 가장 상징적인 산으로 하이킹과 등반으로 인기 있는 곳이다.백종인

- 이전 기사 환상적 산봉우리와 '빙하 밭', 이곳이 바로 몽블랑 https://omn.kr/2aijo에서 이어집니다.

몽블랑 여행을 마치고 지인의 집이 있는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며칠 보낸 후, 스페인으로 떠났다. 번잡한 바르셀로나를 살짝 벗어난 피레네산맥 남쪽 기슭, 고요하고 한적하면서도 장대한 자연 속의 카탈로니아(Catalonia)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약 2,200km에 달하는 긴 여정이었다. 4박 5일의 몽블랑 여행이 짜릿하고 황홀한 경험이었다면, 6박 7일의 카탈로니아 여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이 들고 자꾸 생각나는 푸근한 추억을 선사했다.


바르셀로나 찍고 카다케스로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대성당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로 가우디 건축물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대성당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로 가우디 건축물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백종인

엑상프로방스에서 4시간 반의 기차 여행 끝에 도착한 바르셀로나는 관광철이 한참 지난 9월 말인데도 많은 관광객들로 복잡했다. 가우디가 전부라고 할 정도로 가우디 건축물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길가의 식당들은 만석이었다.

기왕 바르셀로나에 왔으니, 우리도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성당을 비롯한 몇 개의 가우디 건축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반나절 동안 바르셀로나를 유람했다. 스페인어와 다른 카탈로니아어 앞에서 그동안 조금 익힌 스페인어는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카다케스(Cadaques) 달리가 어린 시절 여름휴가를 보냈고, 1930년부터는 평생의 반려자가 된 갈라와 함께 여름 별장을 지어 예술 작업을 한 곳이다.
카다케스(Cadaques)달리가 어린 시절 여름휴가를 보냈고, 1930년부터는 평생의 반려자가 된 갈라와 함께 여름 별장을 지어 예술 작업을 한 곳이다.백종인

이튿날 바르셀로나를 떠나 북서쪽으로 2시간가량 이동, 달리(Salvador Dali)의 여름 별장(현재는 달리 하우스 뮤지엄)이 있는 카다케스(Cadaqués)에 도착했다. 카다케스는 로마 시대 도시인 지로나(Girona)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보트가 가득한 넓은 만에 흰색 건물들이 군집하여 푸른 바다를 더욱 푸르게 했다.

특히, 카다케스는 달리가 어린 시절 여름휴가를 보냈고, 1930년부터는 평생의 반려자가 된 갈라(Gala)와 함께 여름 별장을 지어 예술 작업을 한 곳이기도 했다. 카다케스에서부터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달리가 태어난 피게레스(Figures)까지, 지역 전체가 달리가 만든 달리를 위한 달리 마을이었다.


달리의 3차원 아나모픽 거실 설치물 특정 지점에서 보면 메이 웨스트의 얼굴처럼 보인다.
달리의 3차원 아나모픽 거실 설치물특정 지점에서 보면 메이 웨스트의 얼굴처럼 보인다.백종인

표가 일찍이 매진된 카다케스의 달리 하우스 뮤지엄을 아쉬움과 함께 바깥만 보며 건너뛰고, 스페인에서의 세 번째 날은 피게레스의 달리 뮤지엄(Dali Theatre Museum)에서 시작했다. 거대한 달걀과 황금 조각상으로 장식된 달리 뮤지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극장을 개조한 것으로, 달리 작품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고 지하에는 달리가 묻혀있는 곳이다.

정신 산란한 꿈을 꾸는 듯한 기괴한 작품들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달리 작품에는 카다케스의 바닷가 풍경이 숨어 있었고 그곳 바닷가에 널려 있는 가지각색의 돌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바윗덩이가 쪼개진 형상 페드라포르카

베살루의 고대 다리 벨사루에는 11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옛 돌담과 미로 같은 자갈길이 남아 있어 중세의 느낌이 난다.
베살루의 고대 다리벨사루에는 11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옛 돌담과 미로 같은 자갈길이 남아 있어 중세의 느낌이 난다.백종인

달리 작품으로 어지러워진 머리를 정리할 겸 서쪽으로 25분을 운전해 중세 도시인 베살루(Besalú)에 도착했다. 벨사루에는 11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었고 다리를 건너면 옛 돌담과 미로 같은 자갈길이 남아 있어, 걸으며 중세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숙박지인 올롯(Olot)까지 구불구불한 피레네 산길을 돌면서 계획했던 화산 지대 하이킹 코스를 찾았으나 뚜렷한 출발점을 찾는 데 실패하고, 대신 올롯에 있는 작은 분화구를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네 번째 날, 기어이 산책로를 찾아 걷겠다는 일념으로 피레네 서쪽 길로 향했다. 피레네산맥 기슭을 2시간가량 이동하니 녹색 산맥 위로 치솟은 바위산이 보였다. 큰 바윗덩이가 두 개로 쪼개진 것처럼 보이는 페드라포르카(Pedraforca)였다.

해발 2,500m의 페드라포르카는 카탈로니아에서 가장 상징적인 산으로 하이킹과 등반으로 인기 있는 곳인데, 우리는 일정상 그저 봉우리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한가한 도로변 산책길을 택했다. 배고프고 목이 말라 도로변의 식당에 들어서려는데, 시에스타가 곧 시작되는 시간이라 문을 닫는다고 거절당했다. 그러고 보니 가는 길에 보았던 화원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피레네 산기슭에 방목된 소 피레네 산기슭에서는 방목된 소와 함께 버섯 캐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피레네 산기슭에 방목된 소피레네 산기슭에서는 방목된 소와 함께 버섯 캐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백종인

카탈로니아 유일한 로마네스크 대성당이 있는 라세우두르헬( La Seu d'Urgell)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산길로 나섰다. 산은 끝없이 이어지고 산을 넘을 때마다 산 위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산기슭 이곳저곳에서 버섯 캐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두 할아버지가 나에게 뭐라 이야기를 걸며 버섯 바구니를 보여줬다. 한 분의 바구니에는 작은 모종삽과 핸드폰만이, 다른 분의 바구니에는 버섯이 달랑 세 송이 있었다. 이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나에게 계속 무엇이라 떠들며 즐겁게 웃었다.

뒷산에 올라 바라본 피레네 산기슭의 작은 마을 인구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의 식당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구별이 없었다.
뒷산에 올라 바라본 피레네 산기슭의 작은 마을인구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의 식당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구별이 없었다.백종인

다시 산을 넘어 에리라바(Erill la Vall)라는 인구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멈췄다. 문을 닫는 시에스타가 시작되기 전 점심을 먹기 위하여 한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식당 안은 누가 손님이고 주인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은 작은 마을의 주민들로 식당이 바쁘면 서로 서빙도 하고 도와주며 밥을 사 먹는 모양이었다.

우리야 낯선 손님이지만, 말만 통하면 아니 며칠만 같이 지내면 함께 웃고 떠들며 가족처럼 지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시에스타가 시작되어 조용해진 마을에서 우리는 뒷산에 올라가 사과도 주워 먹고 산딸기도 따 먹으며 놀이터에서 잠깐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곱창 모양의 산길을 지나 피레네에서 가장 높은 스키 리조트가 있는 타울(Taüll)을 둘러보았다.

아찔한 몽레베이협곡

몽레베이협곡의 현수교 몽레베이협곡을 탐방하려면 이 현수교를 지나야 한다.
몽레베이협곡의 현수교몽레베이협곡을 탐방하려면 이 현수교를 지나야 한다.백종인
몽레베이협곡 500m가량 우뚝 솟은 바위 사이를 푸르디푸른 노게라리바고르카나(Noguera Ribagorcana)강이 20m 폭으로 흐르고 있다.
몽레베이협곡500m가량 우뚝 솟은 바위 사이를 푸르디푸른 노게라리바고르카나(Noguera Ribagorcana)강이 20m 폭으로 흐르고 있다.백종인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피레네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콩고스트 데 몽레베이(Congost de Mont-rebei) 협곡으로 갔다. 몽레베이협곡은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로니아 지방과 아라곤 지방을 갈라놓은 협곡으로, 500m가량 우뚝 솟은 바위 사이를 푸르디푸른 노게라리바고르카나(Noguera Ribagorcana)강이 20m 폭으로 흐르는 골짜기다.

이 협곡을 지나가려면 바위 절벽을 파내어 만든 노새 트랙을 통해야 했다. 현수교를 지나고 바위를 깎아 만든 좁은 길을 지나면 수직 절벽에 볼트로 고정한 지그재그 모양의 나무 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데, 저녁에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뮤지엄을 예약해 놓은 우리는 절벽 나무 계단은 구경도 못 했다.

아니 있는 줄도 모르고 한국의 한탄강처럼 잔교를 설치하면 좋겠다는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가슴이 조여 오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험은 못 했으나 협곡 사이 푸른 물이 흐르는 절경을 맛보았고 사진을 찍으러 절벽 가까이 설 때 다리가 떨리는 기분도 충분히 느꼈다.

다시 오고 싶은 북쪽의 피레네 기슭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가우디 명성에 가려졌으나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에서 여전히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바르셀로나 대성당(Barcelona Cathedral)을 지나 달리와 함께 스페인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 뮤지엄(Picasso Museum Barcelona)을 둘러봤다.

그리고 다음날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바르셀로나 거리를 누비고 시장으로 가 방금 수확했거나 생산한 것으로 보이는 싱싱한 과일과 품질 좋고 저렴한 치즈와 햄 등을 맛보고 사기도 했다.

피레네 산골의 석양 피레네 산골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공기와 싱싱하고 저렴한 먹거리로 언제가 다시 돌아가 몇 달이라도 살고 싶은 곳이다.
피레네 산골의 석양피레네 산골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공기와 싱싱하고 저렴한 먹거리로 언제가 다시 돌아가 몇 달이라도 살고 싶은 곳이다.백종인

세계적인 관광도시 바르셀로나는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으나, 조금 벗어난 북쪽의 피레네 기슭은 아름답고 목가적이었으며 사람들은 경쾌하고 친절했다. 몽블랑이 첨탑 같은 산세로 까칠하고 차가운 미모를 뽐내고 있다면, 피레네는 시골의 아낙같이 폭넓은 치마로 모두를 감싸주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여행하는 동안 피레네의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고 싱싱한 먹거리가 돋보여 언제가 다시 돌아가 몇 달이라도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카탈로니아 #가우디 #달리 #피게레스 #몽레베이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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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반 동안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다시 엘에이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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