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 14조 서고문갑오개혁 때 관보에 실린 국한문혼용체 서고문
소와당
그가 태어나던 해부터 나라 안팎에 험난한 파고가 일고 있어서 파란만장의 생애를 예고하고 있었다. 아직 그가 어렸을 적이지만, 동학농민군 2차봉기, 전봉준 등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들 처형, 조정에서 홍범14조 제정, 일본인들 명성황후 살해, 단발령 실시, 태양력 사용, 을미의병, 아관파천,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발족,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 흥선대원군 사망, 열강의 이권 침탈 등 외세의 침략과 정부의 무능한 대처로 국가는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유림은 5세 때에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 마을 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의 어린시절 이름은 화종(花宗)이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항렬에 맞추어 화영(華永)으로 개명하였다.
호는여러가지를 썼다. 월파(越坡·月坡·旦洲) 등이고, 이명은 유림(柳林), 고상진(高尙眞)이었으며, 또 고장성이라 쓰기도 했다.
"1933년의 경성고등법원 판결문이나 중국에서 함께 활동한 인사들은 그를 월파(月波)라 부르지만, 해방 직후 단주 아래에서 활동했던 정인식(한국자주연맹)을 첫 호가 월파(越坡)였다는 사실을 유림에게 직접 들었으며, 단주라는 호가 부산 정치파동 이후에 사용되었다고 전하고 있다."(<해방공간에서의 단주 유림의 정치활동과 독립노동당>)단주 유림선생 제40주기 추모 공훈 선양 대학학술강연회. 2001. 4. 20. 세종문화회관) (주석 3)
유림은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이후 서당에 들어가 서당교육을 받았다. 9세에 사서삼경을 배울 만큼 총명하였다.
경북북부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신식중등학교인 협동학교를 다녔다. 그가 이 학교를 언제 다녔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 학교가 1907년에 개교하여 1회생이 1911년 3월에 졸업했고, 유림이 다닌 시기가 1910년 무렵으로 전해지는 만큼, 그가 1회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인식·김동삼을 비롯한 설립 주역들과 신민회의 이관식이 핵심을 이루었던 시기에 이 학교를 다닌 것이다. (주석 4)
주석
1> 김재명, <유림 선생의 우국혼>, <정경문화>, 1964년 1월호.
2> 김희곤, <단주 유림의 독립운동>, 69~70쪽, <한국근현대사 연구>, 2001년 가을호.
3> 김희곤, 앞의 책, 주석 5.
4> 앞의 책,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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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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