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호석 작가
김희정
박채영 작가를 만나러 '오름오르다' 공방에 가면 작은 마당에 독특한 작품이 설치돼 있었다. 박 작가한테 그 작품에 대해 물으면 "어 그거 고 작가가 만든 거야"라고 쿨하게 말했다. 그 작품을 보면서 고 작가는 '예술 작품을 뚝딱뚝딱 잘 만드는 작가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몇 년이 흘렀을까. 지난 10일 제4회 오름오르다 회원전이 열리는 이천아트홀 갤러리에서 고호석(58. 오름오르다 대표)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제주에서 미술 영재 소년으로 불렸다고 들었다. 부모님은 반응은 어떠셨나?
"부모님은 제가 그림 그리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셨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가 예술을 하면 삶이 힘들다는 인식이 많았다. 그러던 중3 어느 날이었다. 오른쪽 눈이 볼펜에 찔린 사고가 있었다. 곧바로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신촌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고 1년여 가까이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오른쪽 눈은 실명됐다.
요즘처럼 의술이 발달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하릴없이 지내고 있는데 강요배 작가님께서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저희 아버지를 설득해주셨다. 강 작가님은 제주 출신으로 저희 외삼촌이다.
2024년 호반미술상을 수상하셨고 미술(예술) 작품을 통해 제주 4·3 사건 등 제주의 역사적 사건과 제주의 자연 등을 표현하신다. 외삼촌 도움으로 퇴원 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예술고등학교 시험을 봤다.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고 학교생활을 충실히 했다."
- 지금 눈은 어떤가?
"실명 상태, 그대로이다. 한쪽 눈으로 보는 데에 익숙하다."
- 서양화가, 설치미술가로 활동했고 지금은 도예가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셨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대학원의 미학 시간으로 돌아가야한다. 당시 미술평론가로도 명망 높은 교수님께서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책을 교재로 우리나라 미술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 그때 강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서양화에 너무 집중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서양화의 끝이 어딘가 한 번 가보자 할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하고 작업했는데 우리 것에 대한 중심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대학원생들이 한국 미술 분야를 나눠서 일정 기간 깊이 공부한 후 발표하고 토론하는 활동도 했는데 이때 우리 미술 역사가 길고 분야 또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방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가장 한국적인 것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을 찾기 위한 고민과 방황이 시작됐다. 그것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고호석 작가는 경원대와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도자에 입문한 지 25년째. 2010 인천 세계 도시 미술 초청 국제교류전, 제51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입선, 제52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장려, 2023 경상북도인물도자전 특선 등 다양한 상을 수상했고 전시를 열었다.
-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이십 대부터 시작했는데 그 후 어떻게 보냈나?
"한국적인 것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서양화를 작업을 했고 인간의 순수와 양면성을 찾아보는 다양한 실험 설치작품 작업도 많이 했다. 예컨대 약 3m짜리 종이비행기를 만들어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철사(와이어)로 연결하여 공중에 띄워 놨다. 철사 첫 부분에 흰색 종이비행기, 중간엔 회색 그 다음엔 검은색이 벽에 박힌 형상으로 설치했다. 순수를 상징하는 종이비행기를 날리면 어느 지점까지 날아가다가 결국 땅에 떨어진다. 이 작품을 통해 나의 중심을 찾아보자는 시도를 했다.
미술학원을 운영한 적도 있다. 병원 건물, 박물관 등 인테리어 공사도 많이 했다. 공사를 수주한 업체가 부도 난 바람에 연쇄적으로 저도 부도가 나서 공사비를 받지 못하여 힘든 시기를 보낸 적도 있다. 그 당시 같이 일하는 분들 인건비를 드리지 못하여 공동묘지 바로 아래 호숫가에서 한 달 동안 숨어 지냈다. 그땐 공동묘지도 귀신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더 무서웠다. 그렇게 지낸 후 지인의 도움으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빚을 조금씩 청산했고 같이 일했던 분들과의 관계도 회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