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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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 엄마를 참 많이 좋아했다. 초등학교 수업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없으면 단숨에 엄마를 보러 '동우골'로 뛰어가곤 했다. 가서 보면 엄마는 밭에서 자식 사랑하듯 곡식을 대하며 흙을 덮어 북돋아 주고, 잡초를 뽑고 계셨다.
사춘기 때 언니와 내가 "엄마! 딸들을 왜 이렇게 못생기게 낳았어" 하며 투덜대면 엄마는 "너희가 어디가 못생겨? 세상에서 제일 예쁘구먼!" 하셨다. 너그럽게 자식들을 품어주시는 엄마가 나는 좋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난다. 겨울이 되면 막장과 깻잎장아찌를 만든 뒤 아버지 생신(삼월 삼짇날)에 오는 자식들 주려고 줄을 세워놓고 기다리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60년대 중반만 해도 우리 집은 농지정리가 잘된 논들이 많았고 강 옆과 산비탈에 밭들도 있었다. 물과 전답이 좋아서일까? 오빠는 전두환 정권 때 여의도에서 대통령(산업훈장)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동네 어귀에 '쌀 증산왕 송광호' 돌탑이 세워져 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집에서 한 일은 청소, 소 풀 먹이기, 망태기에다 소 먹일 풀 뜯어오기였다. 집에 소가 여러 마리 있다 보니 오빠들이 주로하고 나는 약간 보태는 정도였다. 나는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었는데, 맨날 한적한 계곡에서 혼자 소 풀 먹이려니 많이 지루하고 외로웠다.
내가 6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영호야! 송아지 세 마리 줄 테니 키워서 시집이나 가거라!" 하셨다. 나는 속상해서 밤새 울었고, 아버지는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나를 보고 중학교 입학을 허락해 주셨다. 4km 떨어져 있는 중학교에 통학하라고 자전거까지 사주시면서. 그때 송아지 대신 중학교를 선택한 것은 내 일생을 통해 볼 때 정말 잘한 일이라고 나 자신에게 칭찬해 준다. 그 당시는 아들만 최고로 알았다. 나는 아버지한테 "딸은 아무 소용 없다. 시집가면 그만이다"라는 얘기를 가끔 듣곤 했다. 아버지는 딸들한테 상속권이 없을 때 장가도 가지 않은 아들 셋한테 땅 분배를 해주기도 하셨다.
충남여고 합격, 가장 기뻤던 날 중 하나
중학교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덕에 충남여고에 합격한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날 중 하나다. 그런데 대학진학에 실패하여 무작정 서울 사는 큰언니네로 갔다. 영등포에 있는 피혁회사에 취업해서 가죽 재고 기록과 사무업무를 봤다. 현장 사람은 다 남자였고 경리와 나만 여자였는데 성희롱도 많고, 월급이 3만 원 밖에 안되어서 3년 만에 그만두었다.
내 나이 24살 큰 언니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옆집 아저씨 소개로 신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대화를 나눠보니 정직해 보이기는 했으나 꼴통 끼도 있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결혼 상대는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언니에게 만난 얘기도 하고 내 생각도 말했더니 언니는 "남자는 생활력이 있어야 한다"라면서 더 만나보라고 했다. 자주 만나다 보니 결혼으로 이어진 것 같다. 최근에 들었는데, 그때 내가 월급 3만 원 받을 때 남편은 38만 원 받았다고 한다. 남편은 금형 기술자였고 회사 책임자(공장장)로 있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 처지도 그렇고 남편 덕 보면서 편히 잘살아 보려고 1978년 11월 26일 결혼식을 했다. 서로가 모아 놓은 돈이 없어 100만 원으로 비탈진 달동네 단칸방을 신혼집으로 얻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남편 출근과 동시에 부업으로 나무젓가락에 자개 붙이기, 뜨개질, 작은 수첩에 표지 끼우기 등을 했다. 1980년 2월에 첫딸을 낳았는데 체중 2.3kg의 미숙아였다. 의사 선생님은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기를 바랐지만, 우리 형편에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주변 어른들은 "자식은 또 낳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은 "아기는 똘똘하다. 형편이 정 그러면 집에서 잘 키워보라"라고 하셨다. 아기가 첫돌이 될 때까지 정말 많이 힘들었다. 몸이 안 좋았는지 밤낮 가리지 않고 자주 깨어 울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자라지 못해 너무 작았다. 돌 지나서 걸어 다닐 때는 인형 같다면서 보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내가 먹는 것은 부실하고, 쪼그리고 앉아 부업하고, 저녁이면 술 먹고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아이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결혼해서 5년 동안 열심히 살았고 빚을 조금 내어 1983년에 대지 30평 되는 단독 집을 1500만 원에 구입했다. 나는 남매를 낳고 집도 얻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총각 때부터 기계 두 대를 사놓고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일감이 많은데 공장이 좁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안성에다 땅을 사서 공장을 짓고 시설도 늘렸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기아 사태가 나고, 기아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남편의 일도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남편의 회사는 1997년도 IMF가 오면서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1998년 1월 30일 부도를 맞았다. 당시 집으로 찾아오는 채권자도 있었고, 나는 추운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다. 남편 명의로 된 재산은 다 날아가고 큰댁 지하방 두 칸을 전세로 빌려 이사를 했다. 지금까지 27년째 살고 있는 집이다. 당시 딸은 고3, 아들은 중3이었다.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집에서 가까운 빌딩 지하 식당에서 한식, 중식을 넘나들며 홀 서빙을 하고 배달도 했다. 주말에는 분식집에서도 일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힘든 상황인데도 어쩌면 저렇게 밝고 씩씩하냐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남편은 부도를 맞은 지 3년 만에 CD케이스 일을 시작했다. CD케이스를 제작해서 납품하는 일이었다. 나도 식당 일을 그만두고 남편 일을 도우며 케이스에 부직포 끼우고 비닐 붙이는 일을 했다. 그래도 CD 일 덕분에 딸, 아들 대학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연재1-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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