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복심법원 1919년 판결문
국가보훈부
운문면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때는 1919년 3월 18일이었다. 1908년 사립학교로 개교한 문명학교(文明學校) 졸업생들이 주도했다. 문명학교 졸업생 김상구와 김종태가 광무황제 국장 참배차 상경했다가 서울 상황을 목격하고 귀향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문명학교 졸업생들, 경북 청도 운문면 만세 시위 주도
3월 15일 김재화, 박창기, 손기현이 박창기의 집에서 벽보 20여 장을 만들어 운문면 일원의 대천동, 방음동, 박지동, 오진동 등지의 시장과 그 외 곳곳에 부착했다.
"우리 동포형제들은 이 때를 놓치지 말고 삼천리 강토를 다시 찾아야 한다. 죽음은 한 번이지 두 번이 아니다. 우리 동포형제는 어째서 이렇게 적막한가. 동포여! 이 때는 어느 때인가! 한 번 일어나라.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혈혈(血血) 대한독립만세! "
이 일로 운문 주재소는 3월 18일 오전 강재식, 김대선, 김상구, 김재화, 김종식, 김종태, 김진효, 손한조, 홍용팔, 홍해성 등을 즉각 연행했다. 운문 주재소에서 취조를 받고 귀가하던 이들은 오진동 임봉식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논의했다.
이윽고 이들은 오후 3시 대천동 소재 운문면 사무소로 가서 김종태가 가져온 천에 '대한 독립 만세'와 '독립회'를 써넣어 '독립만세 기' 깃발을 만들었다. 글자는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한 자씩 나눠 썼는데, 이용환이 '립'자를 맡았다. 김진효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한독립만세'와 '독립회' 써넣은 깃발을 흔들며
갓 스무살 이용환이 임봉서 등과 함께 운문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독립 만세"를 불러 주민들을 합세시켰다. 이용환은 일제 경찰이 저지하자, 그날 밤 김문근, 박영묵, 윤병림, 최성희 등 자신이 거주하는 공암동 주민들을 규합해 강가 정자에서 "소년 활동" 창가를 부르며 재차 독립 만세를 외치고 행진했다.
3월 19일 청도 경찰서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5명이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했다. 만세시위로 한창 기세가 올라있던 주민들이 그들에게 순순히 굴복할 리 없었다. 동민들이 일제 경찰을 구타해서 내쫓았다.
이튿날인 3월 20일 대구 헌병분대 헌병 3명과 청도 경찰서장 이하 5명의 경찰이 들이닥쳐 대대적 검거 작업을 벌였다. 이때 이용환도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했다.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이용환 지사에 대해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입니다"라는 설명을 달아 놓았다. 일찍 타계하신 만큼이나 또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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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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