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7일, 박정희 사망 직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도심을 점령한 탱크와 군인들의 모습.
AP/연합뉴스
야당이 국회의 다수석을 확보하고 있는 현실에선 계엄령 발동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는 헌법 제77조 5항에 의거한 주장이다. 국회가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계엄령을 해제할 수 있는 현실에서 누가 계엄령을 발동하느냐는 것이다.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야기다. 법보다 가까운 것은 총이다. 내가 알기로 대한민국 국회의원들 중에 군인들의 총에 맞서 항거할 의원은 결코 재적의원의 과반수를 넘지 않을 것이라 본다. 현 국회의원들에게 '개인의 명리와 나라의 대의 앞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물으면 모두들 나라를 위해 대의를 선택하겠노라고 장담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보안대 지하실에 끌려가 총구 앞에 서서 나라의 대의를 수호하는 의원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61년 5월 16일, 국무총리 장면은 도망갔다. 주한미국대사관을 거쳐,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를 거쳐,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또 계엄령을 발동하였다. 국회의원들의 뱃지를 폐지 줍듯 수거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의 쿠데타를 고발한 의원은 없었다. 1980년 5월 17일엔 계엄령을 해제할 것을 요구할 의원들을 모두 사전에 예비검속하였다.
이것이 계엄령이다. 계엄령은 엄밀히 말하자면 법령이 아니다. 그것은 벌거벗은 폭력이다. 식칼을 들고 설치는 깡패들의 폭력과는 종류가 다른 폭력이라는 말이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헬리콥터와 기관단총으로 시민들에게 총질을 하는 것이 계엄령이다. 아직까지 국회의원들이 이런 국가폭력에 맞서 계엄령을 해제한 사례는 없다.
희한한 일도 있었다. 1979년 12월 12일, 국방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세상에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계엄을 전복한 '역 계엄(Couter martial law)'이라는 유사 이래 찾아볼 수 없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1980년 5월, 국민들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였다. 국회는 5월 20일 계엄을 해제할 것을 결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확대 비상계엄'을 발동하여 이른바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5월 17일 12시에 말이다.
계엄은 벌거벗은 국가폭력이고, 헌정을 짓밟는 쿠데타다. 쿠데타 앞에 법적 절차는 무의미하다.
요즘 군인들은 다르다
어쩌다 <강적들>의 토론을 보았다. 이준석 의원의 발언이 흥미로웠다. '병사들마다 휴대폰을 소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느 장병이 지휘관의 명령대로 국민을 상대로 발포하겠는가?' 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것 같다. 계엄령 이야기는 60대 노인들의 이야기이지, 20대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요즘의 병사는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병사일 것으로 믿는다.
이재명의 계엄령 발언으로 군인들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한다. 모 소령은 군인을 핫바지로 봐도 유분수라고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바람직한 군인의 모습이다. 모 대령은 이렇게 소회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군은 오로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정권 비호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격이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논란을 야기하는 것 자체가 군인의 수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군인 정신이다. 이래서 '역사는 진보한다(History as a progress)'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History repeats itself)'라는 말도 있다. 1980년 5월 18일에서 5월 27일까지 광주의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질을 가한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대든 용감한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