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서울의 한 병원.
소중한
근로기준법은 따로 사직을 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일반 노동자는 사직 시 회사의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 등을 토대로 시점을 상의한다. 퇴사하는 노동자야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악쓰고 싶은 사업장이라도, 일반적으로는 차후의 평판 혹은 남을 동료를 위해 대체 인력을 구할 시간을 주고 남은 사람들에게 업무를 인계한다. 하지만 사직서를 내던진 전공의들은 병원이 대체 인력을 구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병원을 이탈했다. 우왕좌왕하던 병원이 사직서를 수리한 시점이 6월이니 4개월은 근무 현장을 무단 이탈한 셈이다.
이 안하무인격인 현장 이탈은 그 자체로 병원과 고용시장에서 이들에게 허락된 어떤 자유를 보여준다. 경영의 논리 안에서 엄격하게 통제되는 다른 병원 노동자와 달리, 의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처방의 권한을 토대로 다른 병원 노동자에게 오더, 즉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은 의사 직군만이 가지고 있다. 진료의 대부분 과정은 의사의 오더가 없으면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른 병원 노동자의 움직임은 여기에 따라 통제된다. 물론 이는 의사가 사람들을 위해 올바르게 전문성을 발휘한다는 전제 아래 사회가 부여한 것이다.
문제는 이 권력이 진료 현장을 넘어 병원 노동 그리고 의사가 있는 여러 일터의 일상에까지 흘러내린다는 데 있다. 뉴스에도 자주 보도되듯, 의사의 권력을 이용해 동료 노동자들에게 폭언을 휘두르는 사례는 부지기수다(관련기사:
"야! XX 같은 것" 의사 폭언…간호사에겐 일상이었다,
"폭언에 고성"…대학병원 의사 '갑질' 논란 파장). 이보다는 노골적이지 않지만, 외부 회의를 목적으로 진료 일정을 조정하거나, 팀 회의 일정과 일 추진 상황을 자신의 일정에 맞추는 행위도 의사가 아니라면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다.
진료 현장을 팽개치고 나간 의사 집단의 행위는 이 권력을 사람들을 위해 쓰는 대신 의료기관을 마비시키는 데 썼다는 점에서 사회적 믿음을 배반했다. 의사가 나간 뒤 병원이 휘청이는 까닭은 그만큼 병원이 의사 권력 아래서만 움직이도록 짜여졌기 때문이다.
'아수라장' 속 숨겨진 말들
그만큼 의사 면허가 만드는 공고한 권력은 의사를 정점으로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결정한다. 그리고 위계에 따른 불평등을 승인한다. 받는 돈에도 차이가 나지만, 이 위계를 단지 월급 차이로 축소하기에, 이 불평등은 더 너른 영역에 걸쳐있다.
병원의 업무와 운영을 결정하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우선 지방의료원 등 일부 기관을 제외하면 의료기관의 장은 의료법상 의사만이 가능하다. 이뿐이 아니다. 병원의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한 역시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병원의 주요 보직에는 대부분 의사가 있다. 때로 소수의 간호사가 임명되지만, 실제 발언권은 크지 않다.
작은 지역 사회라면 병원에서의 위계 관계가 지역 주민의 일상마저 흔든다. 면허증 혹은 자격증을 가진 노동자가 근무하는 일터는 상당한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는, 지역에 드문 '좋은' 일자리다. 지역에서 의사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도권 대형 병원 은퇴 의사를 포함해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 하는 한국 상황에서 병원이 의사 중심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더욱 심각한 사실을 내포한다. 주로 수도권 출신이거나 근무 조건이 조금만 나빠져도 수도권으로 돌아갈 의사들이, 지역에 사는 노동자의 삶을 제약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환자야 병원에 가면 주로 의사와 간호사만 만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애초에 '의사'와 '간호사'라는 고학력 노동자를 채용하고, 몇 명이 필요할지 기획하고, 환자를 접수받는 사람이 없으면 의사와 간호사조차 병원에 있을 수 없다. 기술집약적으로 돌아가는 최첨단 병원에서 물건을 나르고, 기계를 조작하고, 환자가 먹을 밥을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는 노동자가 없다면 의사도 간호사도 제대로 환자를 만날 수 없다. 병원이 있는 지역 주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제공한다. 지역 주민에게 병원은 삶을 꾸리는 일터이며 병원 노동의 주역 역시 노동하는 주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