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tvn드라마 미생 회식 장면
tvn
나는 실습생이었고 법적으로 미성년자였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어른 행세를 해야 했다. 형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기에 원하지 않아도 매번 형들과 술자리를 함께 해야 했다. 당시 술을 마시지 못하던 나 같은 실습생들은 회사 형들이나 부서내 상사의 술자리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나는 회식이 정말로 싫었다. X세대나 MZ세대나,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회식은 똑같이 힘들고 불편한 자리다. 물론 실습생들 중엔 술을 잘 먹고 좋아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게 억지로 마셔야 하는 소주는 언제나 썼다. 달콤한 메로나와 부드러운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던 나는, 쓰디 쓴 소주를 세상의 쓴 맛을 알기도 전에 마셔야 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나는 회사 형들이 왜 술을 좋아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도 잔업을 마치고 10시쯤 형들이 기숙사에 술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자리엔 다른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형들도 함께였다.
"야, 넌 왜 술 안 먹고 있냐?"
나보다 다섯 살이 많던 형이 술을 안 먹고 앉아있던 나를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죄송한데, 제가 술을 잘 못해서요."
"야 인마, 이놈 순진하네. 앞으로 사회생활 잘하려면 술도 좀 하고 그래야 해. 한잔 받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형이 주는 거니까 한잔 받아."
나는 할 수 없이 소주 잔을 들어 그 형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는 않고 소주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 형은 다른 형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내가 내려 놓은 술잔을 발견하곤 거듭 노려보았다.
"너 술 진짜로 안 마실거야?"
"죄송해요."
"그래. 술 마시기 싫으면 술잔을 엎어 놔. 그럼 술 안 마시는 걸로 알 테니까."
"정말요?"
"그래, 나도 처음엔 술 못 마실땐 그랬어. 괜찮아."
"정말, 그래도 되요?"
나는 처음엔 그 형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형이 거듭 술을 마시기 싫으면 술잔을 엎어 놓으라고 했다. 망설이던 나는 내 앞에 있던 소주 잔을 엎어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당돌한 행동이었다. 나에게 술을 몇 차례 권하던 그 형은 내가 정말 자기 말대로 소주잔을 엎어놓자 '뭐 이런 X이 다있어'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술 안 마실거지?"
"네."
"너, 술 안 마실 거면 저 방에 들어가서 자라."
나는 그 형의 말대로 작은 방으로 건너가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거실에서 들려오는 형들의 번잡한 이야기 소리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게 술을 권하던 형이 다른 형들에게 내 이름을 조용히 물었다. 그러더니 내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야, 쟨 뭔데 형들이 주는 술도 안 먹냐. 게다가 내가 술잔을 엎어 놓으랬다고 진짜로 소주잔을 엎어놓는 건 또 뭐냐. 버릇없는 놈이네?"
그 형은 다른 형들 앞에서 내 이름을 들먹이며 험담을 하기 시작 했다. 겨우 잠이 들려던 나는 순간 훅 잠이 달아나 버렸다. 당혹스러웠다. 험담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과 행동이 그렇게 욕을 먹어야 할 일이었을까? 하지만 다른 형들도 내가 소주잔을 엎어놓은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던지 그 형의 험담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