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지도자 이범영 30주기 추도식’과 ‘이강산의 키큰 나무, 이범영’ 평전 출판 기념 북콘서트에 참석해 기념 촬영을 하는 참가자들
고창남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전국동지회(회장 박영호)가 1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청년단체 지도자들과 시민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30주기 추도식'을 가지고 고 이범영 전 의장을 추모하며 그에 대한 평전 '이강산의 키큰 나무, 이범영' 평전 출판 기념 북콘서트를 가졌다.
이 땅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먼저 가신 열사들도 많고 헌신적으로 활동한 활동가들도 많은데, 청년운동을 함께 한 사람들에게는 한평생 잊히지 않는 인물이 있다. 39세의 짧고 굵은 삶을 살면서 그의 삶 전체가 민주화운동과 청년운동으로 채워진 고 이범영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겸 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의장이 바로 그 인물이다. 이러한 고 이범영 전 의장의 30주기 추모 행사가 열린 것이다.
이날 행사는 1부 추모행사와 2부 북토크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1부 추모행사는 한청협 동지회 박영호 회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박영호 회장은 인사말에서 "이범영 의장은 우리나라 청년운동을 오늘에 이르게 한 사람이다. 39살의 꽃다운 나이에 민족과 청년의 삶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했던 이범영 의장의 삶처럼 우리 한청협 동지들도 끝까지 뜨겁게 희망차게 살자"라고 했다.
▲인사말을 하는 박영호 한청협동지회 회장
고창남
먼저 이인재 서울대 농촌법학회 회장으로부터 '청년지도자 이범영'의 살아온 과정에 대한 약력 소개가 있었다.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의 약력 |
이범영은 1955년 1월 11일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에서 아버지 이호봉, 어머니 홍정숙의 1남4녀중 맏이로 태어났다. 1973년 2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3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74년 서울대학교 농촌법학회 회장이 되었고 1976년 12월 8일 유신반대 시위 주도로 1차 구속되었으며 1979년 10월 병역문제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10.26 이후 2차 구속되었다.
1980년 서울대학교 학내시위 이후에 학교에서 제적되어 수배를 당했다. 1982년 5월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창립에 참여했고 1982년 10월 30일 홍제동성당에서 김승훈 신부 주례로 김설이(당시 베를린 공대)와 결혼했다.
1983년 9월 30일 민청련이 창립되었고 이범영은 새로 발족한 민청련에서 처음 1년 반 정도는 주로 조직사업을 담당하였다.
1984년 11월 5일 첫째 딸 건혜가 태어났고 1985년 3월 민청련 4차총회에서 집행국장에 선임되었다. 1986년 3월 15일 둘째 딸 승민이 태어났다.
1987년 8월 민청련 9차총회에서 이범영의 제안으로 민청련을 '청년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을 결의했다. 그리고 1989년 9월 19일 민청련 11차총회에서 이범영이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89년 1월19일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를 결성하고 이범영이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91년 7월 범민족대회 주도 및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와 관련하여 당국의 수배를 받게 되었고 1992년 2월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가 창립되고 이범영이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92년 11월 민청련 15차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민청련 해소를 결의했다.
1993년 8월 14일 이범영은 범민족대회에 참석했고 1994년 3월 20일 한청협 제3기 대의원 총회에서 이범영이 투명으로 한청협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1994년 8월 12일 이범영은 산소호흡기를 입에 문 지 20여 일 만에 친구, 선후배들, 가족들의 간곡한 기원을 외면한 채, 그렇게도 극진히 사랑하는 한반도를 두고 떠났다. |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의 약력소개에 이어서 각계 인사들의 고 이범영에 대한 추도사가 있었는데, 먼저 이창복 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의장의 추도사가 있었는데, 몸이 불편한 관계로 김진희 원주한지개발원 이사장(전 원주민청 회장)이 대독했다. 이창복 의장은 추도사를 통하여, "30년 전 올해만큼 뜨거웠던 여름날 함께 한 모든 분들의 슬픔을 기억한다. 특히 한청협 동지들의 모습이 많이 생각난다. 이범영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을 때의 나이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버린 청년동지들이 오늘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고 하면서 추도사를 시작했다.
그는 "이범영 동지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했다. 또한 늘 토론하고 설득하려고 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화되는 이 시대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자세야말로 꼭 필요한 자세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동지들이 '이범영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얘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라고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