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중부·남부지방 집중호우로 열차 운행에 차질이 생긴 10일 오전 서울 용산역 전광판에 열차 운행 조정 안내문이 표시돼 있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집중호우에 따른 안전한 열차 운행을 위해 오늘 첫차부터 무궁화호와 ITX-새마을 등 일반 열차의 운행을 일부 중지하거나 조정한다고 밝혔다. 2024.7.10
연합뉴스
옆자리는 50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30초에 한 번꼴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씩씩대며 숨을 쉬고, 혼잣말로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스피커에서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열차가 제 시간에 운행되지 못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서 코뿔소와 같은 기세로 걸어갔다. 아저씨의 발걸음이 향한 저편에는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있었다.
미뤄진 열차시간 때문에 중요한 회의에 늦은 사람도 있을 테고 예약해 둔 병원진료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테다. 이어지는 교통편을 이용할 수 없게 된 사람도 있고 어렵게 잡은 면접 기회를 놓친 사람도 있겠지. 마지막 경우는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안내방송에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해 듣다 보니 밀양역 언니가 떠올랐다 (누가 그랬다. 고마운 사람은 다 '언니'라고). 지나치게 공손했던 말투와 마지막 인사에서 묻어난 안도가 머리에 맴돌았다. 플랫폼과 임시 역사를 가득 메운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고 불평불만을 들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주눅 든 목소리가 이해되었다.
고객들이 당면한 아찔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한 손에는 전화를, 한 손에는 마우스를 들고 대체 차편을 알아보고 있었을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다시 가벽에 붙은 화살표를 따라 임시 역사로 가고 싶어졌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초코바라도 하나 사서 그 언니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 말대로 내가 환승할 기차는 무사히 도착했고 초코바는 생각에만 그쳤다.
누군가 덕분에 돌아가는 세상
어릴 때는 어른들 세상이 완벽하게만 보였다. 어른이 되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친구들이 자기네 회사는 시스템이 아주 엉터리라며 열을 낼 때는 내심 안도하기도 한다. 다들 비슷하구나, 싶어서.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세상을 움직이는 회사의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도 예상치 못하는 상황에서는 삐끗할 수 있다(아니, 비가 이만큼 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일기예보에서 알려줬는데 왜 미리 준비를 못했냐고? 그 예보는 당신들도 봤잖아요. 미리 예상해서 기차, 버스, 비행기 다 예매해 두지 그러셨어요...).
완벽한 어른이 될 줄 알았던 내가 여전히 많은 면에서 서툴고 빈틈 투성이인 것처럼, 우리가 움직이는 세상도 늘 완벽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어릴 때 세상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건, 세상이 정말로 완벽하게 돌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빈틈을 보일 때마다 그 빈틈을 메워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늘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기차가 지연된다고 말해준 밀양역 언니처럼. 세상이 어쩌고 시스템이 어쩌고 하니까 내가 열차 하나쯤 놓쳐도 상관없이 태평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만약 그 언니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제 시간에 데려오지 못할 뻔했다.
오늘 밤에는 코레일 게시판에 들어가서 글 하나 써야겠다. 마음고생 꽤나 했을 언니한테 초코바는 주지 못했지만 칭찬글이라도 하나 써서 마음을 중화시켜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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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엄마, 좋은 아내, 착한 딸이기 전에
행복한 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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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목소리 "여기 밀양역인데요"....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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