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3월 10일 미군의 공습 직후 상공에서 촬영한 일본 도쿄의 모습. ( Japan Air Raids.org 소장 자료 ).
미국 육군공군
원폭 피해 조선으로
당시 일본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 지도자들도 원자폭탄의 엄청난 살상력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도쿄대공습 때보다 더 어마어마한 공습이 있을 거라는 소문만 요란했다.
그렇다면 폭격대상은 어느 곳이 될까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론적으로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지만 미군은 사전에 연막작전을 펼쳤다. 그렇게 해서 오사카가 폭격대상의 한 곳으로 지칭된 것이다.
만약 오사카에 대폭격이 있게 되면 인접해 있는 교토 역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랬기에 도쿄부 중경구 니시노쿄에 살고 있던 정재현은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는 일본 내에서 피난 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 도쿄대공습을 경험했기에, 일본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피난 짐을 싸는 고삼순의 속은 썩어 문들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과 함께 현해탄을 건넌 것이 20년이나 됐다. 생계를 위해 안 한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직장을 다니고 자영업을 했다. 고생 끝에 자식 6남매 중 첫째, 둘째, 셋째는 각각 고등학교와 중학교, 소학교에 다니게 됐다.
남편은 똑똑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받아 조선인들이 밀집해 사는 마을에서 촌장을 맡았다. 일본에서의 삶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쟁과 피난이라니 황망하기만 했다.
이런 아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재현은 "여보. 한두 달만 조선에 갔다 올 테니 살림은 일절 챙기지 마소"라고 했다. 그렇게 자식 6남매와 함께 정재현 부부가 여수를 경유해 전남 영광군 묘량면 삼효리 본가에 도착한 것은 1945년 7월 28일이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정재현은 귀국 이듬해인 1946년에 삼효리 효동마을 이장을 맡게 됐다. 피난차 왔던 고향에서도 몸 편히 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마을 대소사를 맡아 정신없이 바쁜 것이 아니라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기에 마을 이장을 맡게 된 것이 문제였다.
1948년 4월,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제주 4.3항쟁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에 제주항쟁 진압을 위해 파병을 지시했다. 하지만 제14연대 군인들은 "같은 동포에게 총구를 돌릴 수 없다"며 파병을 거부했다. 이른바 여순사건, 여순항쟁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여순항쟁은 오래지 않아 정부군에 의해 진압됐고, 항쟁에 참여한 군인과 민간인 일부는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 투쟁을 하게 됐다. 영광과 함평에 걸쳐 있는 불갑산과 영광 대마면과 장성에 걸쳐 있는 태청산에서도 빨치산이 주둔하며 유격 투쟁을 벌이게 된다.
1948년 11월부터 한국전쟁기까지 빨치산과 대한민국 군경 사이에 한 치의 양보 없는 전투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경상도 산간지대에서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돌았다.
영광군 묘량면 삼효리 효동마을도 마찬가지였다. 간혹가다가 야심한 밤에 불갑산과 태청산, 장암산에 주둔하던 빨치산이 내려왔다. 일명 보급 투쟁으로 주민들에게서 식량을 획득(?)하는 활동이었다.
1949년 추석을 10여 일 앞둔 그 날도 밤손님(빨치산)이 내려왔다. 그들은 마을 이장인 정재현 집으로 와 '쌀을 내놓으라'고 했다. 정재현이 없다고 하니, 대장 격인 사람이 들고 있던 칼을 손수건으로 씻으며 "내일까지 닭과 쌀을 준비해 놓으시오"라고 했다.
6세 아이에게 총 들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