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 시비광주 시립미술관에 있는 시인의 시비
김규영
그에 따르면, 시인 김남주는 전사였단다.
이날, 김남주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전사로서 '재벌 화장 집을 털러가는 길'에 이어 '외갓집 가는 길'이 그에게 왜 중요했는지를 소리 높여 설명하던 김 작가의 말소리가 끊겼다. 꼴머슴과 주인집 딸이었던 부모님을 통해 일찌감치 '계급'의 실체에 눈을 떴던 김남주의 삶을 떠올리다보니 목이 잠긴 것이다.
"김남주는 전사였습니다. 그리고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시 <자유>는 김남주가 가진 전사의 사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라고 그는 외쳤습니다."
김형수 작가는 <자유>에 곡을 붙여 노래하던 가수 안치환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김남주 생전에 그가 김남주에게 고백하기를, 노래 후렴구이자 시의 마지막 연을 부를 때마다 너무 찔려서 부끄럽다고 했단다. 하니 김남주 시인은 "사실은 나도 그래"하고 말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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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지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김남주, <자유> 부분
북클럽에 모인 참가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당당하게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온 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전사의 삶을 산 김남주도 그렇게 말했으니! 오송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김남주와 수감생활을 함께 했던 군산 출신의 시인, 이광웅 시 <목숨을 걸고>가 떠오르는 지점이었다.
당시 '남민전' 수감자의 석방을 돕자고 외친 유일한 인물이었던 문익환 목사의 말씀도 떠올랐다.
"감옥에서 막 석방된 문익환 목사가 유일하게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석방을 도와야 한다고, 이걸 우리의 운동으로 삼자고 역설하고 다녔다. 저마다 생각이 같든 다르든 목숨을 걸어본 사람들의 행동을 가벼이 평가하는 건 매우 부당한 짓이라는 말씀이었다." ("김남주 평전" 375쪽)
그렇게 목숨을 건 김남주의 삶과 뜻에 경탄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따르기에는 김남주의 삶과 뜻이 너무 어렵다,고 어느 참여자가 질문했다. 이에 김형수 작가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한번도, 그 누구도 계몽하지 않았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김남주는 그저 '읽기 쉬운 시'로 자신의 뜻을 밝혔을 뿐이다.
김형수 작가는 김남주가 '시인'인 이유를 다시 밝혔다. 김남주는 평전 뒷부분에 밝혔듯이 김수영, 신동엽, 김지하가 이루지 못한 지점을 넘어선 시인이었다. 천재적인 지적역량을 보였던 김지하와 비교해도 모자람없는 김남주가 끝까지 '해남 촌놈'으로 살았다는 것을 그는 매우 높이 평가했다.
누구보다 많이 읽고 공부한 '광주학파'의 지성이었지만, 모나지 않은 언어로 시를 쓰려고 했다. 김남주를 전혀 모르는 젊은 층이 읽어도 그의 시는 잘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선입견없이 시를 읽어내어 현재 자신들을 억압하는 것을 발견하며 김남주를 알아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