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춘 EBS이사장이 5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며 1987년 6월 10일 항쟁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민
- 1987년 당시 군부독재가 굉장히 삼엄했던 시절이었고, 20대-30대 청년으로서 군부에 대항해 선뜻 나서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럼에도 항쟁에 참여한 이유는 뭐였나?
유시춘 (이하 유) "국본(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본부) 상임 집행위원으로 성명서 작성을 도맡아했다. 당시 나를 포함한 청년들과 넥타이 부대들이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가장 큰 이유는 고문 정권에 대한 분노였다. 아울러 우리나라가 북한도 아닌데 체육관에 모여가지고 99.7% 찬성으로 대통령 뽑는 법률과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었다. "
박성순(이하 박) "당시 성당을 오가면서 성명서를 복사하고 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아버님(박종진 신부)이 인권 활동을 하시면서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의문사가 굉장히 많았다.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 버리고, 며칠 되지 않아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이 잦았고 굉장한 의문이 들었다. 민간인 사찰도 많았다. 그러면서 이런 일들에 참여하게 되고 의식을 갖게 됐다."
- 당시 시대정신은 뭐였다고 보나?
유 "독재타도, 민주정치였다."
박 "인권과 정의였다. 사회운동가가 아닌 신앙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당시 상황은 로마제국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상황과 닮아 있었다. 권력자들이 민중들을 억압하고 독재를 하던 것인데, 신학적 관점에서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 지금 정부를 군사정권에 빗대어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두 시대를 겪어본 입장에서 어떻게 보는가.
유 "전두환과 비교하기는 약간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적어도 전두환 때처럼 영장 없이 사람 체포해가고 고문해서 죽이는 그런 일은 없지 않나. 87년 6월 항쟁에서의 시민들의 헌신, 땀의 결과는 아직 유효하다. 다만 헌법에 명기된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는 경향은 같다. 법기술을 통한 시행령 정치, 정권 비판 언론에 대한 중징계, 수사 등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 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역주행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박 "성직자로서 (정치적인 부분을)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다만, 이태원 참사와 채상병 문제 등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보면 아쉬운 부분이 있다. 어떻게 하면 유가족 등 당사자들을 보듬고 위로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책임을 회피하고, 정치적인 논리로만 받아들이는 부분은 좀 더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