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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천인공노할 노릇 아니냐"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창원유족회, 유족 증언 담은 책 <그날의 눈물> 펴내

등록 2024.05.31 09:57수정 2024.05.3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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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위령탑. ⓒ 창원유족회

 
책장을 넘길수록 먹먹함은 더해만 갔다. (큰‧작은) 아버지와 오빠가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 그리고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른 채 70년 넘는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아온 이들의 피맺힌 증언을 읽으니 가슴이 더 무거워졌다.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창원유족회(회장 노치수)가 펴낸 책 <그날의 눈물>(수우당 간)에는 "잊혀져 가는 유족들의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노치수 회장이 유족 8명의 증언을 듣고 정리한 것이다.

한때 누구나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참혹함을 유족의 입을 통해 어렵게 들추어냈다. 정당한 재판 절차도 없이 군인‧경찰이라는 국가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 당했던 민간인들의 억울한 사연이 70년이 훨씬 지나서 나왔다.

2살 때 28세 아버지와 31세 큰아버지가 학살 당했다고 한 강아무개(75)씨는 "어머니 말씀으로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저녁에 세 사람이 와 잠깐 보자며 대문 밖으로 불려갔단다"라며 "큰집, 작은집 당하다 보니 집안이 엉망진창이 됐다"라고 했다. 제삿날은 불려 나간 날로, 아버지는 7월 15일이고 큰아버지는 하루 앞날인 7월 14일이다.

"연좌제나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의 어려움"에 대해,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항선을 타려고 응시한 곳이 일본 회사였고, 합격했을 때 여권을 낼 수가 없어 애를 먹다가 3급 공무원 3명 이상의 보증을 받아오면 여권을 내어주겠다고 해서 검사, 전신전화국 과정, 동장이 보증을 서줘 외항선을 탈 수 있었다"라고 털어놓았다.

당시 22세였던 오빠가 학살을 당했던 김아무개(86)씨는 "부보님은 하나뿐인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매일 장독 위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렸고, 아들이 보고 싶어 술을 마시며 가슴을 치면서 평생을 살았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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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유족회가 펴낸 책 <그날의 눈물> 표지. ⓒ 윤성효

 
"형무소가 텅텅 비워져 있었다고..."

당시 35세 아버지를 잃었던 김아무개(80)씨는 "할머니께서는 매일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밤낮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다 하고, 저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매일 집안에 사진만 걸어놓고 하루 빨리 오시기만을 기다렸다"라고 회상했다.


41세 큰아버지가 학살되었던 노아무개(71)씨는 "어디서 처형을 당하셨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그때 소문으로는 괭이바다에서 당하지 않았겠나 추측할 뿐"이라며 "시신도 못 찾다 보니 무덤도 없다"라고 했다. 제삿날은 돌아가신 분의 날짜를 모를 때 지내는 '9월 9일'이다.

33세 아버지를 잃은 방아무개(86)씨는 "외동이신 아버지가 가실 때는 보지 못했고, 뒤에 듣기로는, 당숙집에 잠시 피신해 있을 때 동네 어느 집에 불이 나서 불 꺼려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라며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시리라 매일 대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시던 모습이 생생하다"라고 했다.


자신이 두 살 때 29세의 아버지를 잃은 이아무개(75)씨는 "할머니께서는 아버지가 마산형무소로 갔다고 해서, 음력 7월 15일 찾아가니 마산형무소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지난 밤에 사람들을 트럭에 싣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형무소를 텅텅 비워져 있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올해 1월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74년 만에 아버지가 '무죄' 선고를 받았던 것과 관련해, 이씨는 "일단은 좋았다. 묘한 기분이 들어 눈물만 났다. 그 뒤 검찰청에서 미안하다며 안내장이 왔는데, 그것을 읽어보고 처자식을 두고 떠난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라고 전했다.

30세 형이 희생 당한 지아무개(81)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7월 중순경 행방불명되셨다"라며 "부모들은 당시 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고, 이후 소개령으로 마을에서 강제로 피난을 가게 돼 사람을 찾아다닐 수도 없는 지경이 됐다"라고 술회했다.

연좌제 피해와 관련해 그는 "군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하면서 무척 친한 동기와 함께 간부로 지원하기로 했지만, 저는 당시 형의 일 때문에 신원조회로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간부지원을 포기했다"라며 "간부에 지원했던 동기는 후일 대령까지 진급해 군생활을 마쳤다"라고 털어놓았다.

외동이었던 42세의 아버지를 잃은 최아무개(75)씨는 "시신도 못 찾았다. 소문으로 마산 앞바다로 알고 있었는데 유족회에서 괭이바다라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다"라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위패를 같이 합봉해 안장했다. 60년이 지난 후 산소를 모셨다"라고 말했다. 제삿날은 음력 9월 9일.

최씨의 아버지는 74년만인 올해 1월 법원에서 열린 형사재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최씨는 "2021년에 유족회 도움으로 재심신청했는데 검찰이 항고, 재항고를 해서 대법원까지 갔다가 무죄를 선고 받았다"라며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편안하게 천도하시길 빌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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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희생자 '창원유족회'는 2016년 7월 9일 오후 수장 현장인 마산만 '괭이바다'에서 '합동 추도식'을 열었다. 한 유족이 고무퐁선에 바람을 적어 날리고 있다. ⓒ 윤성효

 
"정말 천인공노할 노릇 아니냐"

또 책에는 노치수 회장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실규명을 위해 오랫동안 활동해온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 김영진 전 경남도의원, 김주완 작가, 노창섭 전 창원시의원, 이상익 사회복지법인 가야 이사장과 나눈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김영만 고문은 경남도·창원시와 유족회가 2022년 11월 마산 가포 바닷가에 세운 추모위령탑에 대해 "제막식 때 그 자리에 온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말을 한 마디씩 '아, 명당이다' 하고 소리쳤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갈 곳 없어 수십 년 구천을 헤매던 원혼들께서 이곳을 찾아오신 느낌이 확 다가왔다"라고 말했다. 위령탑은 괭이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것이다.

김 고문은 "위령탑에 새겨져 있는 희생자 명단을 적은 명석비에 이름을 다 채우지 못한 빈 공간을 보면서 마음이 아려 왔다. 언젠가는 그 명석비에 이름이 빼곡하게 채워지기를 속으로 빌었다"라고 했다.

노치수 회장은 발간사에서 "1950년 이승만 정부시절 한국전쟁의 빌미로 전국적으로 백만이 넘는 민간인들이 가족은 물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고, 어디에서 어떻게 학살 당했는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7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라고 말했다.

이어 "1960년 제4대 국회 때 경남도청에서 옛 마산유족회 간부들이 국회특별조사반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마산형무소에서 예비검속된 1681명을 다 죽였다'는 이야기만 나올 뿐 마산, 창원, 진해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어디에 얼마나 죽였는지 확실하게 밝혀진 게 없다"라며 "1950년 7월과 9월 사이 네 차례에 걸쳐 괭이바다에서 717명 이상 학살 수장시킨 내용과 창원 인근 15곳의 산이나 골짜기에서 죽인 것만 알려질 뿐이다. 정말 천인공노할 노릇 아니냐"라고 했다.

노치수 회장은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가 사라지고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세월과 함께 없어져 버리지만 이 책이 나옴으로 인해 그동안의 민간인 희생의 사실들이 고스란히 기록물로 남게 됐으니 책 출간의 의미는 참으로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날의 눈물>이 널리 읽혀져 한국현대사 속에서의 민간인의 억울한 희생에 고개 숙여 추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희망해 본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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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비문. ⓒ 윤성효

#민간인학살 #창원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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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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