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겨울 마을 수비대가 대문에 X자형으로 나무를 박은 표복암 집이 있던 곳
박만순
"여보. (애들) 고모부가 소를 가져간당께요. 뭐라 쫌 해보소." 안달이 난 아내가 하는 소리에 표재진은 넋이 나간 듯 하늘만 바라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시 큰집에 있던 황소를 집안 사촌 매제인 박아무개가 끌고 가는데 아무런 항의나 제지도 하지 않았다.
당시 부역자로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된 이의 집에서는 수비대가 소를 포함한 가축, 가재도구 등을 강탈해 갔다. 그런 시대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집안사람이 당시 재산목록 1호였던 황소를 끌고 가다니, 환장할 일이었다. 특히나 박아무개는 일제강점기 암태도 소작쟁의의 핵심 지도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강탈해간 소를 자은면 유각리에 사는 이에게 팔아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해 겨울에는 와우리 주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발생했다. 불과 한 달 전에 모래산에서 같은 마을 사람 100여 명을 학살한 수비대가 몇몇 집의 대문에 나무를 X자로 박았기 때문이다. 즉 이 집은 '빨갱이의 집이므로 출입을 금(禁)한다'는 것이었다.
일전에는 그 집에서 가축이나 가재도구를 강탈해간 이들이 이번에는 집 대문에 나무를 박아버린 것이다. 비록 그 집들의 주인이 모두 죽었더라도 근처에는 집안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결국 '빨갱이 집안은 이렇게 된다'는 엄포용 행위는 살아 있는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격이었다.
표정애(당시 11세)는 1950년 겨울, 넓은 할아버지 집에 얼씬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집에 살던 할아버지, 할머니, 숙부, 숙모, 사촌 동생이 죽임을 당해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랬다. 빈집은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해서 너무나 무서웠다.
당시 살던 집이 비좁아 가족들이 이불 하나에 의존해 한 방에 살았어도 할아버지 집에 가서 잠을 잘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볼일이 급해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집은 변소(화장실)도 넓고 좋았지만 1950년 11월 14일 모래산에서의 사건 이후 그 집에는 얼씬 거리지도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집 대문에 나무를 X자로 박아 놨으니 더욱이 그랬다.
모래산 사건, 그 후
술상 앞에서 흥얼거리는 남편을 바라보는 조봉임은 한숨이 나왔다. 남편은 모래산 사건 이후로 정신줄을 놓았다. 그의 집안에서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시동생, 조카 7명이 모래산에서 죽고 남진창고와 내치 등지에서 7명이 죽어 총 14명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분가해 시아버지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천만다행으로 수비대가 남편과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해꼬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남편의 넋이 나갔다.
살아 있는 것에 괴로워했고, 특히 시부모의 유해를 수습한 1954년 봄 이후에는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남편은 일체 농사 일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술만 먹으면 광적인 증세가 나타나서 남아나는 살림 도구가 없었다.
냄비, 접시는 물론이고 보이는 살림 도구는 죄다 마당에 던져졌다. 얼마 전에는 톱으로 기둥을 자르기도 했다. 살림 도구나 집 기둥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특히 팔꿈치가 남아나지 않았다. 술만 먹으면 술상을 팔꿈치로 내리치며 흥얼거리는 통에 남편의 팔꿈치는 늘 퉁퉁 부어 있었다. 이러다가 남편이 잘못되는 건 아닌지 덜컥 걱정이 들었다.
남편에게 "이제는 자식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니냐!"고도 하고, 두 손 빌며 사정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사실 남편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자기도 한 식구이기는 하지만 친정아버지, 친정어머니가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자신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