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소설집 <다섯 번째 감각> 표지
아작
비로소 SF 장르에 매력을 느낀 독자로서, 얼마 전 읽은 김초엽의 에세이에서 '시간이 지나야 유용해지는 책'이라고 소개했던 김보영 작가의 책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SF 작가가 인정하는 SF 작품은 과연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어떤 질감으로 그 세계를 구축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 세상에 간섭하며 어떤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까.
김보영 소설집 <다섯 번째 감각>은 10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인상적인 것은 표제작인 '다섯 번째 감각'이다.
소설의 세상은 청각을 잃어버린 세상이다. 전쟁으로 유전자에 변형이 와서 사람들은 청각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은 다른 역사와 기록은 복구했지만 청각에 관한 것은 어둠 속에 묻어 둔다. 그럼에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살아남았고 청각을 회복한 사람들도 생겨난다.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교육과 사회적 압력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또 다른 감각을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다.
주인공 연주는 언니가 교통사고로 죽은 이후 '청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언니가 당한 교통사고의 진상을 조사한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은 연주에게 사고와는 무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의문을 품은 연주는 언니의 세상을 추적하게 되고 다섯 번째 감각의 세상을 찾게 된다.
시작은 혼란스러운 연주에게 언니를 알았던 윤성의 접근이다. 연주에게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윤성은 언니와 다섯 번째 감각을 통해 소통했다고 말한다. '보지 않고도 서로가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청각의 세상', 연주를 통해 윤성을 추적하는 사람들은 그 세상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청각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향해 스스로 초능력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며 제정신이 아닌 집단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작품은 소리의 세계가 갖는 엄청난 힘에 대해 얘기한다.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미사곡, 군중들의 응원가, 합창, 독주, 군가, 노동요 등. 음악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리듬을 탈 수 있고, 마음을 움직여 지지하게 하고, 마약처럼 중독되며 연대를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고, 눈물이 앞을 가리고 노래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
체제를 유지하고 통제하려는 집단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두려울 것이다.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체제를 선동하고 무너뜨릴 수 있는 커다란 위험 요소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어떤 세상도 통제를 통해 유지될 수 있는 안녕이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잡혀가고, 이유도 없이 사라지는' 불의한 현실을 연주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지금의 세상도 어둠 속에 묻어두고 싶은 감각이 있는 것 같다. 물리적 압력을 가해서라도 감각을 잊은 것처럼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세상. 소설의 세상이 들을 수 있는 귀를 지운 세상이라면 2024년은 말할 수 있는 입을 지우려는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3대 '입틀막' 사건이 널리 회자된다. 1월 18일 국정 기조를 바꿔달라는 강성희 진보당 의원의 강제 퇴장 사태, 2월 16일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R&D 예산을 복원하라는 외침에 졸업생이 강제퇴장 당한 사건, 2월 1일 의료개혁 관련 민생 토론회에 입장하려다 거부당한 소아청소년과 의사 연행 사건이다. 오랫동안 생각해서 입으로 뱉어내는 말의 힘, 청각의 세상을 알게 된 연주만큼이나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입으로 뱉은 말은 힘을 가진다. 아무리 오래 생각했어도 머릿속에 있는 동안에는 되돌아갈 여지가 있다. 하지만 말한 후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나는 내게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버렸음을 깨달았다.(p.236 '마지막 늑대')
작가 '김보영은 인간의 경험에 대해 장르를 바꾸는 시각을 제공한다.'(퍼블리셔스 위클리)고 말한다. 작가 스스로는 '무식한 시간을 들여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소설을 쓰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SF 독자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 소설은 절박하면서도 현실적이다.
모든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온다. 모르는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여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세상을 잘못 읽는 것은 권력과 권위가 통제하는 세상에 스스로를 맡겨두기 때문은 아닐까? 연주의 귀가 열린 것처럼 우리가 목소리를 내면 새로운 차원의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감각
김보영 (지은이),
아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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