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6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수출선적부두 옆 야적장에 완성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소득 정규직 노동자의 대명사인 울산을 보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종속적 관계를 알 수 있다. 울산의 자동차 산업은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의 숙련을 자동화, 로봇, AI, 모듈화가 대체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생산기술을 담당하는 대졸 이상 기술직(이하 엔지니어)인데, 이들은 울산에서 근무하지 않는다. 울산의 또 다른 대표산업인 조선 산업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산업에서 고객(선주)이 요구하는 선박과 해양플랜트의 사양(spec)을 공간으로 구현해 현장의 생산직 노동자가 직접 용접할 수 있도록 하는 도면을 만들고, 건조 과정에 필요한 부품과 자재의 목록을 정리하는 설계 엔지니어들은 울산에 없다.
그렇다면 현장을 자동화시키고, 조선설계를 담당하는 대졸 엔지니어는 '어디'에서 근무할까? 현대자동차 생산기술 엔지니어들은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남양연구소 소속이고, HD한국조선해양 엔지니어링 센터는 경기도 판교에 있다. 현장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엔지니어들이 모두 현장과 동떨어져 수도권에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공간분업의 결과로 빚어진 이공계 대졸자들의 수도권 배치 때문이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이래로 많은 제조대기업의 공장과 조선소가 남동임해지역에 입지했지만, 본사는 수도권에 입지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실례로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의 대공장은 울산에 있지만, 본사는 서울에 있었다. 본사가 울산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정도를 제외하면 울산에 공장이 입지한 석유화학 및 비철 분야의 본사는 대부분 처음부터 서울이었다.
산업화 초기에 제조대기업의 본사가 서울에 자리 잡았던 이유는 회사 운영자금의 안정적인 조달 때문이었다. 자금 조달을 '보증'할 수 있는 산업은행·수출입은행·재무부 등 정책금융기관이나 정부기관이 모두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제조대기업의 본사는 기획, 영업, 재무 등 경영지원 부서를 거느리고 서울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공계 대학을 졸업하고 제조대기업에 입사한 엔지니어는 남동임해지역의 공장으로 배치되었다. 현장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사업장 내에 위치한 설계센터, 연구개발 센터나 생산관리본부 등에서 근무하고, 생산직 노동자들과 공장에서 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알파엔진을 개발하는 과정이나 최초의 독자생산 모델 자동차인 포니를 생산하는 과정이 그랬다. 대부분의 '제조' 과정은 생산 거점인 울산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우수한 이공계 졸업생과 엔지니어를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이공계 병역특례가 활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들의 수도권 전개가 시작됐다. 첫 번째 공간분업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울산공장이 위치한 울산 북구, 용인 마북리, 전주 등에 있던 연구개발 센터를 경기도 화성 남양연구소로 옮겼다. 현대자동차는 1984년 울산에 79만 평방제곱미터의 주행시험장을 준공하고 연이어 충돌시험장 및 시험연구실을 설립했지만, 10년만에 연구개발의 중심축을 수도권으로 옮겼다.
그리고 각 공장의 생산관리자와 인사(노무)관리자 정도를 제외한 개발, 설계, 디자인과 관련된 인력을 남양연구소로 차근차근 이동했다. 남양연구소는 연구개발뿐만 아니라 양산 과정 자체를 연구소에서 시험할 수 있는 파일럿센터를 갖고 있는 세계 유일의 연구소다.
연구개발과 파일럿센터까지 갖춘 남양연구소는 한국 자동차 산업 혁신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생산 현장과 분리됨에 따라 엔지니어와 생산 노동자의 분리를 낳았고, 노동이 주변화되었다. 한국 최초의 독자 개발 엔진인 알파엔진은 오늘의 한국 자동차 산업을 열어준 쾌거였으나, 울산 관점에서 보자면 자동차 산업의 혁신으로부터 배제되기 시작되었다는 상징이었다.
엔지니어들의 다수가 남양연구소로 집결하면서 현장의 상황과 의견은 의사결정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주변화되었다. 엔지니어와 노동이 함께 있어야 신차의 라인 설계와 작업편의를 조정하고 신차 일정에 맞춰 기존의 생산 중인 작업을 조정할 수 있는데, 엔지니어가 현장과 떨어지면서 지금은 탑다운으로 지시가 내려가고 현장은 무조건 지시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노동의 주변화는 사측이 현장과 협력과 조율을 통해 혁신과 생산성을 제고하기보다는 현장과 에지니어의 접촉면을 줄여 갈등을 우회하고, 생산 현장은 과부하가 걸리게 되었다. 기존 차량 생산에 다양한 신차 생산 지시가 더해지면서 현장은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요구에 무조건 적응해야 했고, 노동강도 강화와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조선 산업의 경우 자동차보다는 그 전개가 더뎠다. HD현대중공업의 경우 선박과 해양플랜트의 기본설계분야가 2010년대에 서울로 이동했고, 2020년 연구개발센터가 판교로 이전했다. 현재 나머지 설계 분야 중 생산설계를 제외한 상세설계분야까지 판교로 이전 중이다. 조선 산업 사무직의 60~70% 가량이 설계 엔지니어라는 것을 감안하면, 다수의 대졸 이상 인력이 수도권으로 향하는 셈이다.
석유화학단지의 많은 기업연구소는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지 오래다. 그러나 대덕도 서울에서 멀다고 경기도 판교, 화성, 평택, 용인의 부지를 수소문하는 중이다. 울산의 3대 산업에 소재·부품·장비를 납품하던 중소·중견기업 중 '눈 밝은 기업'들, 특히 디지털·그린 전환과 연관된 납품사들이 선제적인 인재 확보와 원청과의 수월한 연구개발 협조를 위해 울산에서 수도권으로 입지를 옮기기 시작한 것은 불문가지다.
사실 제조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은 1960년대 후반 애초 입지를 대덕연구단지로 잡았다. 그때 과학기술처 최형섭 전 장관은 "대덕 이남이면 우수한 인재가 안 모인다"고 했었는데, 기업들은 출연연에 비해서는 늦었지만 결과적으로 '북상'을 선택한다. '천안분계선' 이남으로는 좋은 인재가 안 온다는 말은 덤이다. 제조대기업들은 진정한 '1차 공간분업'을 실현하기 시작한다. 본사의 기능뿐 아니라, 제조 과정의 상류 부문인 '구상' 기능 전체를 수도권으로 넘겼으니 말이다.
두 번째 공간분업 : 고부가가치 산업의 생산시설의 수도권 지향
2010년대에 벌어진 일은 그 이상이다. 앞서 언급한 소재·부품·장비 분야 중소·중견기업 뿐만 아니라 원청 제조대기업의 공장이 속속 수도권으로 모이는 중이다. 즉 두 번째 공간분업으로 고부가가치 공장이 수도권으로 향하는 중이다. 2019년 SK하이닉스의 신규 공장이 구미 대신 용인을 선택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이나 현대제철 당진조선소 등과 같이, 수도권 규제의 '칼끝'이 닿지 않는 충남권에도 많은 제조대기업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충남이 수도권 전철망에 통합되면서 제조대기업 공장의 북상을 지원했다. 요컨대 '구상'과 '실행'이 분화되는 것을 넘어서, '구상'이 '실행' 기능을 끌어당기는 형국이다.
게다가 제조대기업 관점에서는 공장을 짓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의 허들이 산업화 초기보다 훨씬 낮아졌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시기의 대규모 산단에 공장을 꽉 채워 짓거나 조선소, 석유화학 플랜트를 설치하는 일은 재벌 대기업들에게 '그룹의 명운'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해외로부터든 국민투자기금(현 주택도시기금)을 통해서든 대출을 일으켜야 했다. 그리고 정부의 지불보증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선진 자본주의 국가 금융권 관점에서 이들은 모두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 제조업으로 실적을 냈던 적이 없는 '벤처 자본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부지 확보와 인력 확보 측면에서도 정부의 도움 없이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에 따라 저리 기업 대출, 해외 차관 등을 폭넓게 활용하면서 정부가 지정하는 산단 부지에 공장을 짓고 다양한 규제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재벌은 점차 정부의 규제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현대그룹과 삼성그룹 등 정부가 아니라 대기업이 자체로 구축한 서산의 대산석유화학단지가 대표적인 예이다. 대기업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용으로 대출을 일으키고, 자본시장을 활용해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됐기에, 정부가 '생산량 과잉'이라는 명분으로 반대하더라도 오너의 의지에 따라 대규모 산단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비수도권의 생산 하청기지화 전락을 막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