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의 다른 글 나가서 하면 '돈 버는 일'이 되는데 집에서 하면 '놀고 먹는 일'이 되는 요상한 일이 있다. 바로 집안 '살림'이다. 할머니들과 글쓰기를 하다보면 이 질문을 피해갈 수가 없다. 지금이야 살림 유튜버가 300만 조회수를 만드는 시대지만, 내가 만나는 할머니들 세상에서는 살림은 '그냥'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 어르신 글쓰기 교실에서 '내가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것'에 대해 써보자고 했다. 배움이 짧다고 늘 한탄하시는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딱히 시간 쓰는 게 없으요. 나돌아 다니기도 승질에 안 맞아요. 집에서 반찬 만들어 먹고, 청소하고 그리 있는데 제일 시간 쓰는 게 뭐가 있다요?" 나는 반찬 만들어 먹는 그 이야기도 글이 된다고 했다. 어르신은 여전히 난감해 하셨다. 어제는 뭐 해 드셨냐고 물었더니 꽁치조림이 나온다. 그걸 어떻게 하셨냐고 물으니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나는 또 속기사가 되어 받아적었다. "작은 냄비 달궈서 들기름을 두른다. 고소한 냄새가 쑥 올라오면 총각김치 씻쳐(씻어) 놓고 씻친 꽁치 올리면 반은 끝난다. 고춧가루, 다진 마늘, 매실액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한다. 나는 막 양념 휘황찬란하게 안한다. 간단해도 재료 좋으면 맛있다. 양파는 크게, 대파는 잔잔하게 썬다. 물을 자꾸 물어보는데 그냥 내가 봐서 탈 거 같으면 물을 더 넣고 아니면 더 쫄이면 그만이다. 그럼 내 먹기에 딱 적당하고 맛있다. 이것만 놓고 먹기 심심하니 취나물도 무친다. 봄에는 된장을 쳐야 맛있고 겨울에는 기름에 볶는 게 맛있다." 이 어르신은 한글 쓰기를 어려워하셔서 매번 내가 받아 적는다. 처음에는 그게 미안해서 수업을 취소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우리 수업 이름이 '내 인생 쓰면'이 아니고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지 않냐고, 말로 풀어도 제가 다 받아적는 능력자이니 안심하시라 했다. 그때부터 어르신은 수업 10분 전에 틀림없이 그 자리를 지키면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박수로, 미소로 반응하신다. 내 부모님보다 나이 많은 분들 앞에 강사로 서는 내게 그 박수와 미소는 글자 그대로 따뜻한 햇살이다. 갓 만든 꽁치 조림과 취나물 된장 무침을 혼자 먹는 밥상에 차릴 줄 아는 젊은이는 몇이나 될까. 나를 위한 끼니를 매일 차리는 그 손길 덕에 어르신이 조금 더 다정하고 탄탄해진 게 아닐까.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일은 회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회식 자리 술에 쩔어 있는 대신, 꽁치 조림이 보글보글 끓는 그 작은 냄비에서 시작될 지도 모르겠다. 그 다정과 탄탄을 당신 본인만 모르신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그렇다. 식당을 오래 하셨다는 할머니 말고는 다들 집에서 살림만 하신 분들이다. 나는 식당 꽁치조림은 돈 받는 일인데 집에서 하는 꽁치조림은 왜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하시냐고 되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들 살림은 '그냥'을 벗어나지 못하는 하루다. 이 납작한 하루를 글쓰기 펌프로 통통하게 올려본다. 행주를 팔팔 삶는 손길이, 먼지 쌓인 창틀을 쓱 지나는 걸레 한 줌이, 텃밭에서 살랑거리는 상추 이파리가 할머니들의 글을 윤기나게 어루만진다.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간단하지만 신선한 아침상을 차리고, 복지관 와서 글을 쓰고 친구와 밥을 먹고,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아까 삶은 행주를 햇빛에 뽀얗게 널어놓는 하루, 하루에 하나의 삶이 녹아있는 것 같았다. 내가 먹을 밥 한 끼 제대로 차리지 못해도 자신의 삶을 멀리 계획하고 촘촘히 엮어가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구부정한 등을 끌고 다니며 꽁치 조림 하나 끓이는 할머니보다 그 촘촘한 누구가 얼핏 보기에 더 멋져보인다. 그러나 내 방식으로 자전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 밖에서 요구하는 일들에 끌려다닌다면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싶어졌다. 펌프질 하느라 기운이 쏙 빠졌다. 집까지 1시간 반을 가야 했다. 지하철 역 근처 햄버거집 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내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시원한 생수 한 병만 원샷하고 지하철을 탔다. 허기도 잠잠해졌다. 집에 와서 오분도미 쌀, 흑미, 렌틸콩을 씻어 압력솥에 안치고 친정 텃밭에서 뜯어온 달래로 달래장을 만들었다. 갓 지은 밥을 생김에 싸서 뻑뻑한 달래장을 담뿍 찍어 먹었다. 내 방식의 자전은 내가 손질해 만든 달래장에 있었다. 큰사진보기 ▲내가 만든 자전갓 지은 밥, 텃밭 달래를 손질해서 만든 달래장, 마른 김최은영 다음주에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총각김치 꽁치조림 때문에 자기 돌봄 기술을 하나 획득했다고, 어르신들이 그런 이야기를 더 많이 써주셔야 저처럼 진짜 삶의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더 많아질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귀히 여기는 기운이 여기서부터 퍼져나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내인생풀면책한권 추천8 댓글 스크랩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구독다음 채널구독 글 최은영 (christey) 내방 구독하기 글과 음악을 짓는 프리랜서 이 기자의 최신기사 41년생 어르신도 "재밌다"는 수업의 정체 구독하기 연재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내풀책) 다음글10화시니어 글쓰기 강사가 제일 많이 하는 말 현재글9화나가서 하면 돈 버는 일, 집에서 하면 '놀고 먹는' 일 이전글8화'설명 말고 보여주세요'... 박수 터져나온 글쓰기 비법 추천 연재 전강수의 경세제민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이야기 "사과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날 서점은 눈물바다가 됐다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와글와글 공동육아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SNS 인기콘텐츠 의대 증원 이유, 속내 드러낸 윤 대통령 발언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이충재 칼럼] '김건희 나라'의 아부꾼들 "끝내자 윤건희, 용산방송 거부" 울먹인 KBS 직원들 한강, 노벨상 수상 후 첫 공개행보 "6년간 책 3권 쓰는 일에 몰두" 영상뉴스 전체보기 추천 영상뉴스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이창수 "김건희 주가조작 영장 청구 없었다"...거짓말 들통 "망언도 이런 망언이..." 이재명, 김문수·김광동·박지향 파면 요구 AD AD AD 인기기사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Please activate JavaScript for write a comment in LiveRe. 공유하기 닫기 나가서 하면 돈 버는 일, 집에서 하면 '놀고 먹는' 일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밴드 메일 URL복사 닫기 닫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취소 확인 숨기기 이 연재의 다른 글 11화무례한 질문을 무력화 시키는 법 10화시니어 글쓰기 강사가 제일 많이 하는 말 9화나가서 하면 돈 버는 일, 집에서 하면 '놀고 먹는' 일 8화'설명 말고 보여주세요'... 박수 터져나온 글쓰기 비법 7화글도 좁게 가야 빛이 납니다 맨위로 연도별 콘텐츠 보기 ohmynews 닫기 검색어 입력폼 검색 삭제 로그인 하기 (로그인 후, 내방을 이용하세요) 전체기사 HOT인기기사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미디어 민족·국제 사는이야기 여행 책동네 특별면 만평·만화 카드뉴스 그래픽뉴스 뉴스지도 영상뉴스 광주전라 대전충청 부산경남 대구경북 인천경기 생나무 페이스북오마이뉴스페이스북 페이스북피클페이스북 시리즈 논쟁 오마이팩트 그룹 지역뉴스펼치기 광주전라 대전충청 부산경남 강원제주 대구경북 인천경기 서울 오마이포토펼치기 뉴스갤러리 스타갤러리 전체갤러리 페이스북오마이포토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포토트위터 오마이TV펼치기 전체영상 프로그램 쏙쏙뉴스 영상뉴스 오마이TV 유튜브 페이스북오마이TV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TV트위터 오마이스타펼치기 스페셜 갤러리 스포츠 전체기사 페이스북오마이스타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스타트위터 카카오스토리오마이스타카카오스토리 10만인클럽펼치기 후원/증액하기 리포트 특강 열린편집국 페이스북10만인클럽페이스북 트위터10만인클럽트위터 오마이뉴스앱오마이뉴스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