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대전현충원 측이 서춘의 묘비를 제거했다.애국지사 서훈이 박탈된 1996년이후 8년만의 일이다.
심규상
"'파~묘'요!"
영화 <파묘>를 보면 유가족과 일꾼들이 파묘 전 "파묘요!'를 크게 외친다. 오컬트는 아니지만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에도 파묘의 서사가 있다.
독립운동 행적이 가짜로 밝혀지거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취소되면 현충원을 나가야 한다. 파묘다.
대전현충원에서 서훈 취소로 파묘된 인물 중에는 우선 서춘(1894~1944)이 있다. 그는 1919년 2.8 독립선언서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1963년 서훈을 받아 1989년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2.8 독립선언 위원 중 한 사람이었으나 이후 변절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알려진 매일신보사의 주필을 지낼 때,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일할 때 친일 행위가 드러나 서훈이 박탈(1996년)됐다.
하지만 서훈이 박탈된 후에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1묘역에서 8년을 더 머물렀다. 이장을 요구했지만 유족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전현충원 측이 묘비를 뽑자 그제서야 유족들이 파묘(이장)했다. 당시 <오마이뉴스>는 그의 묘비가 뽑힌 일과 파묘 사실을 각각 처음 보도했다(관련 기사:
서훈 박탈 8년 만에 '서춘' 묘비 뽑히다 http://bit.ly/2kWA5D).
또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던 인물 중 박성행(1892∼1950), 김응순(1891~1958), 박영회, 유재기(1905∼1949), 이동락(1890∼1969)도 친일 행위가 드러나 서훈이 박탈(2010년 또는 2011년)됐다. 이후 파묘를 하기까지는 또 수년이 걸렸다. 박성행의 경우 2015년 말에야 파묘했다. 대전현충원이 풍수지리상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이라 유족에게는 묫바람(묏자리에 탈이 나서 누워 있던 영혼들이 편안하지 않아 후손들에게 해를 미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인지 대부분이 이장을 미뤘다.
강영석(1906~1991)은 서훈이 취소됐지만 묘비만 뽑히고 파묘는 면했다. 그의 부인 신경애(1907~1964)는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활동 등으로 건국포장(2008년)을 받았다. 친일 행위가 드러나 서훈이 취소됐지만, 부인의 안장 자격을 빌려 여전히 안장돼 있다.
대전현충원 첫 파묘 시위 대상은 김창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