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분청사기 박지 철채모란문 자라병. 병모양이 자라를 닮았다. 조선 세조~성종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청자도 백자도 아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구한 역사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때 한 나라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는 격동의 시기에는 늘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많았다. 우리 역사도 그러했다. 7세기 말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서로 패권을 다투며 통일전쟁을 하던 시기가 그러했고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등장할 때도 그랬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기는 더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아 470여 년을 이어오던 고려 왕국이 멸하고 유교의 나라 조선이 건국되던 과도기.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여말선초'라 부르는 이 시기는 우리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대변혁이 예고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문화강국 '고려(KOREA)'라는 나라를 세계에 알리며 오늘날 K-컬처의 원조가 된 '고려청자'도 이 격동의 시기를 비켜 갈 수 없었다. 무능한 군주와 문벌귀족들의 부패로 고려 왕조가 쇠망하고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들어서면서 사회는 큰 혼란를 겪는다. 이 와중에 고려의 하이테크 산업이었던 청자 산업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비색의 청자를 굽던 바닷가 '관요'는 왜구들의 침략과 약탈로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워지게 된다. 도공들은 제 살 길을 찾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개인 '사요'를 차린다. 정권이 바뀌든 말든 도공들은 늘 하던 대로 도자기를 구웠으나 예전과 같은 영롱한 비취색의 청자가 나오지 않았다.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흙과 물과 땔나무가 바뀌었고 관청에서 엄격히 통제하던 품질관리 방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도공들은 청자를 빚을 때 조금씩 사용하던 하얀 흙으로 도자기 표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자기의 탄생은 이렇게 회색의 태토 위에 백토를 바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말 그대로 '분으로 장식한 청자'는 고향을 떠나온 도공들의 고뇌가 담겨있는 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