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나가사키의 구 글래버 저택이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라고 오인한 나가사키시 향토사학자들의 발표로 인해 글래버 저택이 나비부인의 집이라는 잘봇된 얘기가 퍼지게 되었고,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하나 글래버 베넷’이 나비부인의 딸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지게 되었다. 사진은 인천의 ‘하나 글래버 베넷’ 묘지석으로 여전히 나비부인의 딸이라고 적혀있다.
인천관동갤러리
강연은 1시간가량 진행되었는데 요점은 '하나 글래버 베넷' 일가가 고향 영국 스코틀랜드를 떠나 나가사키에 정착하면서 무역상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과 일본의 현지처 츠루와의 사이에 낳은 딸 '하나 글래버 베넷' 등 가족 소개였다. 이어 '하나 글래버 베넷'이 일본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딸로 잘못 알려진 진상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었다.
참고로 '하나 글래버 베넷'은 오페라 나비부인의 딸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브라이언 교수는 힘주어 말했다. 다만, 나가사키시에서는 '하나 글래버 베넷'의 저택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경제적으로 파급효과가 생기자 나비부인 딸이 아닌 데도 관련자들이 그대로 침묵하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하나 글래버 베넷'은 21살 되던 해(1897)에 남편 월터 베넷의 홈링거회사 인천지점 근무를 위해 건너와 4명의 자녀를 낳고 40년을 살다가 62살(1938) 되던 해 인천에서 죽어 인천외국인묘지(현재는 인천가족공원묘지) 에 묻혔다. '하나 글래버 베넷'과 그 가족에 대한 영상강의를 마친 브라이언 교수는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살다 인천에 묻힌 '하나 글래버 베넷'을 통해 앞으로 나가사키와 인천이 서로 사이좋게 우정을 나누는 도시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보도자료를 접했을 때 가졌던 낯선 이름 '하나 글래버 베넷'이란 여성에 대한 호기심은 브라이언 교수의 1시간여 영상강의로 대강 풀렸다. 영상강의 뒤, 질의 응답시간에 기자가 한 질문에 속시원한 답변은 없었다.
곧, "서울외국인묘지인 양화진이란 곳에는 개항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외국인들이 많이 묻혀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베델, 헐버트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일본 근대화 시기, 손꼽히는 인물인 '하나 글래버 베넷'의 아버지(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에서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무역상으로 소개한 그녀의 아버지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가 혹시 한국과 관련된 사업이라든가 한국에 도움을 준 점은 없는지 말해달라"는 질문에 브라이언 교수는 "좋은 지적이다. 그것은 나의 앞으로의 과제다"라고 말끝을 흐렸다.
하기야, 비대면 영상강의인 데다가 시간도 고작 1시간 남짓이었으니 깊이 있는 답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없었으리라.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변변한 자료는 없었다. 그나마 한국 위키사전이 이 인물에 대해 풀어 놓은 것 외에는 발견하지 못해 이것이나마 그대로 옮겨본다. (위키사전에서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이고, 이번 인천관동갤러리 자료에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로 표기됐다-기자 주)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1838년 6월 6일 ~ 1911년 12월 13일)는 19세기 후반에 일본 나가사키시에 체류한 스코틀랜드 상인이다. 사실상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이며,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구라바엔(글로버 가든)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 당시 일본 내에서 가장 번성하던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 지역)에 신식 무기들을 판매하였으며, 그 무기는 1864년의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같은 위키사전이지만 일본어판 위키사전은 다르다. 일본 위키사전은 더욱 상세할 뿐 아니라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를 다룬 책 <명치유신과 영국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明治維新とイギリス商人 トマス・グラバーの生涯)>(岩波新書, 1993) 등 단행본만 11권이 소개될 정도로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두고 있었다.
일설에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가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홀 럿셀 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조슈번(長州藩)에 판매한 배 가운데 하나가 운요호(雲揚, 운양호)로 이 배는 조선을 침략한 운요호사건(1875, 일본이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방화 등을 자행한 사건으로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짐)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는 조슈번과 사쓰마번 소속 젊은 사무라이(무사) 9명의 영국 유학자금을 댄 인물이다. 당시 유학생 가운데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와 일본은 상당한 친밀한 인연이 있었지만, 한국과의 인연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일본에서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가 어린이고 어른이고 간에 대단한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해서는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의 딸인 '하나 글래버 베넷'의 일생을 돌아보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우리도 그의 아버지이자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래버'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인천과 나가사키 두 곳을 살다 간 그의 딸 '하나 글래버 베넷'에 대한 전시회도 그런 바탕을 알고나서 보면 더욱 흥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