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말을 안 하는 친구 때문에 아이는 답답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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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 월요일이었다. 스쿨버스를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아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터져오르는 울분을 참아내기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간 얼굴에서, 평소 같지 않게 얇고 떨리는 목소리에서, 초조함에 갈 곳을 잃은 손짓에서 아이의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 A가 나랑 말을 안 해. 점심 먹을 때도 내 옆에 앉지 않았어. 엄마, 나 너무 답답해."
"왜 너랑 말을 안 하려고 하는지 A한테 물어 봤어?"
"응, 개인적인 이유라고 했어. 그러고는 아무 말도 안 해."
아이는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숙제를 하고, 책을 읽고, 저녁을 먹었다. 그날 밤, 잠을 청하려 누운 아이는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곤 이렇게 물어봤다.
"엄마, A가 내일도 나랑 이야기를 안 하면 어쩌지?"
"오늘 네가 엄청 힘든 날을 보냈구나.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말을 안 하니 네 마음이 얼마나 답답할까. 친구가 말을 안 하는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진 않을 텐데. 내일 학교 가서 상황을 다시 한번 보자. 내일은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올 수도 있잖아."
아이는 이불 대신 지푸라기를 깔아놓은 듯 불편한 마음을 가득 안고 잠을 청했다.
지난해 9월, 4학년(미국 학제 기준)에 올라가며 아이는 A를 만났다. A는 블랙핑크와 BTS를 좋아했고, 아이는 A가 한국어 가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해 알려주기도 하고 발음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아이와 A는 엄마들의 핸드폰으로 영상 통화를 했고, 주말이면 A 집이나 우리집에서 같이 놀았다.
아이들이 잘 어울리니 나도 A의 엄마와 친해졌다. A네는 대만에서 온 식구들이었고,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 쉬운 편이었다. 내가 담근 김치가 맛날 때는 김치를 나눴고, A의 엄마가 대만으로 출장을 다녀오면 대만의 유명한 파인애플 쿠키를 선물 해 줄 만큼 가까워졌다.
다음날, 아이는 전날보다 더한 울분이 가득 찬 얼굴로 하교했다. 신발을 벗으며 첫마디가 이랬다.
"엄마 아직도 여전히 A가 말을 안 해. 나 말고 다른 아이들이랑은 말하는데 나한테만 말을 안 해."
이틀째 말을 하지 않는다는 A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입 삼킨 고구마가 목구멍에 걸린 듯 답답해졌다. 주말에 A의 식구들과 점심까지 함께 먹었던 터라 나 역시 A가 아이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 '개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 시간에 아이의 방에 들어가니 아이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다. 학교를 다녀온 후 책을 읽고, 동생과 보드게임을 하고, 좋아하는 깻잎 반찬이 있는 저녁을 먹고도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A 때문에 답답해?"
아이는 연신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직접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때도 있어.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찌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야.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니까.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갔다 오면 제일 좋겠지만 그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이럴 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아야 해. 앞으로 그 친구가 너를 어떻게 대하는지 조금 더 지켜보자. 그리고 구멍이 난 너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에 집중하자. 자라면서 더 많은 친구를 만나게 될 텐데, 어쩌면 지금 이 일이 친구들 사이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해프닝의 시작일 수도 있어.
이번 해프닝을 시작으로 친구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할지 고민해 보자.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이고, 너 뒤에 서 있어. 네가 울고 싶고 답답할 때 지금처럼 늘 같이 있어 줄게."
상처가 아물면서 자라는 아이들
여기까지 말하고 아이를 안았다. 아이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흐느끼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이제 잘 수 있다고 말하는 아이를 뒤로하고 나오는데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이 떠올랐다.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는 초등학교 4학년 '선'과 전학생 '지아'의 우정이 한순간 사소한 말과 행동으로 어긋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선과 지아와의 관계가 삐끗거리기 시작한 순간, 아이들 사이에 등장하는 다른 친구들의 이간질에 불거지는 오해들, 다시 화해할 것 같은 순간 불쑥 삐져나오는 모난 마음들까지도 이야기는 묘하게 아이의 현재 상황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