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선생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베이징 진스팡지에 단재 선생이 세들어 살던 집은 지금 봐도 누추하지만 이곳에서 박자혜 여사와 단란한 생활을 꾸리고, 아들 수범씨도 낳았다. 하지만 그 시간도 얼마지 않아 가족을 고국에 돌려보내야하는 처지가 됐다
조창완
그러나 박자혜는 한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들이 영양실조로 시름할 때에도, "네 아비는 훌륭한 사람이란다. 원망하지 말고 잘 자라나거라."라고 달랬다.
박자혜는 극심한 가난과 자식의 병고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간여하였다. 남편도 개입한 의열단원 나석주 의거를 도운 것이다. 1926년 12월 나석주가 서울에 들어와 수탈기관 조선식산은행과 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질 때, 두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그를 은신시켜 주었다. 황해도 출신인 나석주 의사가 서울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무렵 신채호는 아나키즘에 심취하면서 정신은 더욱 명료해지고 사상의 갈래는 대초원같이 끝없이 펼쳐지는 듯 하였다. 지적인 즐거움도 쏠쏠했다. 틈나는 대로 세계적인 아나키스트들의 저서를 찾아 읽었다. 지배가 없고 특권이 주어지지 않고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나키즘 외에 달리 방략이 없는 듯 하였다. 1925년 경부터 유자명의 소개로 알게된 대만인 아나키스트 임병문(林炳文)과 서울에서 온 이지영(이필현) 등과 자주 어울렸다. 그도 투철한 아나키즘 신봉자였다.
신채호는 역사 저술과 아나키즘 단체의 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베이징 외곽 보타암에서 '비승비속'의 처지로 언제까지 절간 신세를 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베이징 외각에 방을 구해 혼자 기거하였다.
식생활이 부실한 데다 각종 사료를 뒤지고 밤낮 가리지 않고 글을 쓰다보니 시력이 크게 나빠졌다. 안질이었다. 실명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여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시력이 더 나빠지기 전에 당신과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소."
염치없는 남편이었다. 조국해방운동도 좋고, 역사연구도 좋지만, 아내와 아들은 이게 무슨 꼴인가. 그렇다고 여비라도 보내주면서 만나고 싶다는 편지라면 또 모를까…. 서울에서 베이징까지 불원만리 길이 아닌가. 그래도 편지를 받은 박자혜는 마냥 즐거웠다.
"남편을 만난다니…."
남편이 고국으로 들어올 수 없는 처지이니, 아내가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늘 감시하는 종로경찰서 형사를 따돌리기 위해 머리를 썼다. 시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충청도 대덕으로 가는 것처럼 이웃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어렵게 노자를 마련하여 기차로 국경을 넘었다. 독립운동가 가족이 사는 마을에는 경찰에서 박아논 고첩들이 있어서 언행이 수시로 총독부에 보고되었다.
1928년 초 박자혜는 어느새 8살이 된 아들과 함께 '남편 찾아 3만리'길에 올라 베이징에 도착했다. 7년 만의 재회,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많이 쇠약해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반가움 보다는 복바치는 설움이 부부를 끌어안게 만들었다. 몰라보게 자란 아들 수범이가 뜨악한 표정으로 아비라 불리는 중늙은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 순간 부부는 다시 한 번 울컥 가슴이 매었다.
"저 어린 것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신채호 부부는 생활고와 독립운동의 일로 2년여 만에 다시 헤어져야 했다. 박자혜는 어린 아들과 뱃속에 아이를 품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것이 이승에서 마지막이 된 생이별이었다.
신채호는 1928년 베이징에서 <탈환>·<동방>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동방무정부주의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조직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일경에 피체되고, 10년 형이 선고되어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인(囚人)이 된 신채호는 가끔씩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박자혜는 밀린 집세 등 어려움을 넋두리삼아 남편에게 호소했더니, "정 할 수 없거든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라는 답신이었다. 아내나 남편이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신채호가 투옥 8년 만인 1936년 2월 뇌일혈로 위독하다는, 뤼순형무소에서 박자혜에게 전보로 알려왔다. 출옥 후 그의 활동이 두려운 일제가 살해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따른다. 박자혜의 통절한 '제문'에서 저간의 사정을 살피게 한다.
단재의 사후 둘째 아들 두범이는 1942년 15살 때에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숨지고, 첫째 아들 수범이는 어렵게 한성상업학교를 나와 아버지의 자취를 찾아 만주로 떠나고,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박자혜는 조국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10월 16일 단칸 셋방에서 외롭게 숨졌다.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2008년 박자혜의 위패를 남편의 묘소에 안치함으로써 사후 27년 만에 남편 곁으로 갔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