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당시, 교수단 시위 현수막 글씨를 쓰고 있는 임창순 선생.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4.19혁명기념도서관
우리 근현대사에서 성공한 혁명은 1960년 4.19혁명이 유일하다. 그래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 계승"을 명시했다. 4월혁명이 성공하기까지는 곡절이 따랐다.
4월혁명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노리는 3.15부정선거에서 촉발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해방 후 축적된 사회모순과 경찰지배체제의 폭압에서 발원하였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1960년 4월 19일 고등학생·대학생을 비롯해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하고, 일부 경찰서와 악명높은 반공회관 등에 불을 질렀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하고 6,260명이 부상당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에 서울 등 주요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으로 시위를 봉쇄하는 한편 내각에 유혈사태의 책임을 지워 퇴진시키고, 본인은 자유당 총재직에서 사퇴하는 등 일련의 모션을 취하고 반전을 시도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하고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만큼 노회한 인물이다.
계엄군의 봉쇄로 시위가 일시 중지되었다. 시민·학생들은 분노를 삼키면서 일단 시국의 추이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공동묘지와 같은 침체의 시간이었다. 이런 시점에 일단의 대학교수들이 움직였다. 4월 25일 교수단 데모의 시발을 알아본다. 4월 23일 청중대학 이정규 학장이 서울에서 모임을 주선하여 10여 명이 은밀히 모였다. 임창순 교수의 증언이다.
그때 나온 얘기의 골자는 학생들이 나서서 피 흘리고 있는데 우리 선생들도 체면이 있으니까 성명서라도 하나 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였어요. 다들 좋다고 동의했고, 그러다가 나중에 내가 이런 얘기를 꺼냈어요. 결자해지라고 사태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물러가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자기는 나쁘지 않고 사람 잘못 둬서 그런다는 식의 개각 정도로 미봉하려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점점 나빠져서 학생들 피만 흘렸지 그 성과는 없어지는 거다. 학생들의 운동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아직까지 학생들에게서도 대통령을 몰아내야 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으나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고 성명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 문제를 내세워서 성명서를 내는데 서명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 그게 문제다, 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다들 "아이구, 그 서명은 받아내기 어려울 거요"라고 해요. 그래서 체면 세우기 위해서 내는 것 뿐이라면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고 나와버렸어요.(<4.25 교수 데모에 앞장 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청명 임창순>,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는 불씨는 용케 살아났다. 동료 교수들의 동력을 얻어 그 다음 날 여러 사람이 다시 모여 25일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서울의 전체 교수회의를 열기로 진척되었다. 교수단 회의가 열리고 손명현 교수가 기초한 성명서가 준비되고 고려대학에서 만든 플래카드 '전국대학교수단'이란 글자 밑에 조윤제 교수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제안하고, 임창순 교수가 붓을 들어 힘찬 필체로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썼다.
4월 25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동숭동 서울대학의 함춘원을 출발하여 미대사관 앞을 지나서 시청·태평로를 지나 국회 앞에서 이항녕 교수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 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항의 시국선언문 이었다. 이날 시위대는 변희용·권오돈 교수가 맨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임창순·이항녕·정석해 외 1명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교수단 시위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26일 또 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함으로써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새로 임명된 외무장관 허정, 계엄사령관 송요찬과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