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만 이사장(사진 왼쪽)과 이진 박사.
노재숙
"저는 동독 민주화의 주역이면서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4선 국회의원입니다. 1943년생인데요. 히틀러 집권 시 폐허에서 태어났고 어려운 성장 시기를 보냈어요. 패전 후 4개 전승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베를린을 분할해 점령했습니다. 제가 자란 동베를린은 소련 점령지가 됐고, 곧 동독의 수도가 됐습니다.
동독은 스탈린의 모델을 따랐는데, 저는 성장하면서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8세 때 베를린 장벽이 설치됐고, 이때 동독이 독재국가임을 알게 됐어요.
당시 집권했던 사회주의통일당(아래 사통당, 이날 방문한 재단은 이 사통당의 독재 청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은 시민을 통제했어요. 장벽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미 인민들의 봉기가 있었고, 국민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국가의 소유물일 뿐이었어요. 동·서독이 장벽 설치 전에는 서로 교류가 원활했기에 장벽의 설치는 급작스러운 단절을 야기했고, 시민들의 삶은 균열이 시작됐습니다.
장벽 설치 전, 제가 서베를린 지역에 위치한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1976년 서독 정치교육학자들이 정립한 교육지침, 강제성 금지 - 논쟁성 유지 - 정치적 행위 강화를 주내용으로 한다 - 편집자 주) 훨씬 이전이었는데요.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세요?'라고 물으니 '조금 기다려봐. 너희들이 좀 생각이 커지면 얘기해줄게'라고 대답했어요. 선생님은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주입하지 않았어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체감케 했다고 생각합니다.
동독 학교에서는 '당의 말씀은 항상 옳아요'라는 노래를 배웠어요.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교육이었죠. 청바지도 미제국주의의 산물이라며 못 입게 하는 등 복장도 통제했습니다."
"연대는 사람들을 용기로 이끌어 움직이게 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동독을 탈출하려고 했어요. 동독인들은 라디오를 포함해 서독의 방송 80% 정도를 시청했습니다. 그러면서 '같은 민족인데 서독은 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잘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때 제가 내린 결론은 '서로 다른 체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독인들은 '우리도 서독처럼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마음을 얘기할 수는 없었죠. 불만을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동독은 결핍 사회였고 정치·군사·외교면에서 서방 세계와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주도로 맺어진 나토와 바르샤바조약 간의 경쟁은 적어도 냉전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낳긴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나토와 바르샤바조약의 중간에 위치했던 분단기 동서독은 1980년대 핵 경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서독 미디어를 보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게 된 동독인들은 동독의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이 동독이 평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0년대는 저마다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지만 표출은 못 하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핵으로 인해 더 큰 두려움에 봉착해 있었어요. 급기야 사람들이 개인적 두려움을 넘어 연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연대는 사람들을 용기로 이끌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교회 '평화 모임'에서 싹 튼 민주주의
"동독에서 모든 공식 행사는 집권당이 주관했습니다. 그렇기에 사회적 문제를 따질 공적 공간은 거의 남아 있지 못했습니다. 당내에선 불만을 말하기 힘든 분위기였고 종교기관은 상대적으로 집권당의 지배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었어요.
바로 여기에 작은 출구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토론이 가능하도록 몇몇 목사가 길을 열어줬습니다. 이곳에서 민주주의의 싹이 텄어요. 저는 그런 소수 목사 중 하나였습니다. 교회에서의 모임을 '평화 모임'이라고 불렀죠. 이 모임이 점점 확산됐고 해방구로서 역할을 하게 됐어요. 100여 명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수천 명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을 다 수용하지 못해 교회 밖에서도 모였습니다.
한편, 서독이 전략적으로 동독 정부를 헬싱키협약에 끌어들임으로써 동독인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이때 소련에서는 정치적으로 강경했던 브레즈네프가 물러난 뒤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가 등장했어요.
라이프치히의 평화혁명이 첫 기폭제가 됐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밖에 모여 있었던 2000여 명의 사람들에게도 방송으로 전달됐죠.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오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같이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라고 했고, 이는 자발적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이를 본 동독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은 경각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진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더 많은, 8만여 명이 모였습니다. 시위대는 갈수록 처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됐고, 역으로 국가가 두려움을갖게 됐습니다. 4주에 걸쳐 연대는 커졌고 동독 전역으로 시위가 확산됐어요."
한순간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