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한 뼘 크기의 '자화상'2023년 9월 13일 오전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간담회 참석자가 '자화상'을 살펴보는 모습(자료사진).
연합뉴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일했던 장욱진은 학생들 사이에서 절대 가르치는 법이 없는 교수로 통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림을 가르치느냐. 자기 그림을 그려야지!' 간단하지만 심오한 지론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그림에 대한 고집이 대단했다. 1926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현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책에 있는 까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온통 까맣게 색칠해서 제출했다가 '병(丙)'이라는 낮은 등급의 성적을 받은 일도 있다. 그림은 그려보며 연구하는 것이지 말로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던 사람이 김지하에게 일갈(一喝)에 가까운 지적을 한 것이다. '그저 그림 그리는 죄밖에 없다'던 장욱진에게 그림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림은 붓 이전에 생각이 먼저야!' 장욱진의 역설(力說)이다. 생각이 발상으로 이어지고 그림의 됨됨이도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 대상을 결정한 다음 그것에 충실하게 화폭만 메우면 된다는 고전파 이래의 화가들과 달리 무슨 생각을 채우느냐가 늘 고민거리였다. 그는 그것을 '인상파 이후의 자아(自我)의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종종 무덤 같은 고독을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전쟁 중이던 1951년에 고향인 충남 연기에서 그린 <자화상>이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모습이라고 밝혔다.
그림, '행위'와 '표현'의 세계
그림을 '행위'[제작 과정]와 '결과'[표현]로 구분한 장욱진은 양자의 관계를 저항의 연속으로 보았다. 행위가 유쾌할 수만도 없고 설령 재밌다 해도 결과는 비참할 때가 많다고 했다. 더 나아가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저항 속에 사는 것 같고 자기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있다면 자신의 종식(終熄)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생명 있는 행위'를 통해서만 조금이나마 '뜻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생명 있는 행위란 사물을 착실히 그리고 철저하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잡념이 섞이거나 순수하지 못하면 결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붓에 욕심이 들어가면 그림은 사라지는 법이다. 화가 권옥연(權玉淵, 1923~2011)은 화가는 정신 연령이 다섯 살 넘으면 그림을 못 그린다고 말했다.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 1905~1966)과 이웃으로서 가깝게 지냈던 장욱진 역시 무언가에 물들기 이전의 어린이 같은 티 없이 맑고 단순한 마음 상태를 좋아했다.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불가에서 붓다(buddha)는 '눈뜬 이'를 의미하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m) 볼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어쩌면 장욱진이 지향했던 것은 붓다였는지도 모른다.
장욱진은 불교 명상 가운데 '마음챙김(sati)'이나 진배없는 정관자(靜觀者)의 자세를 중시했다. 아무런 방해 없이 고요와 고독 속에서 자기를 한곳에 몰아세워 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절간 같은 덕소에서 만 12년, 수안보에서 6년, 신갈에서 5년을 수행승(修行僧)처럼 지냈다. 시끄러운 잡음을 떠나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자연의 침묵'과 풍요로운 내적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말대로 우주 가운데 홀로 고립돼 영혼의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화두(話頭)처럼 먹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미륵존여래불(彌勒尊如來佛)'이란 글씨도 그가 제일 좋아했던 수안보 미륵리와 세계사(世界寺)에서 연원한다.
그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가 갈파한 '창조된 생명이 분만될 때까지 꿋꿋하게 기다리는 일만이 예술가의 삶'이란 말을 좋아했다. 꾸준히 추구하며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날마다 배우고 고통스러워하며 그러면서도 그 괴로움에 지치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 예술가의 충만한 생활이라고 했다. 마치 '술 익기를 기다리듯' 고마워하며 난산(難産)의 진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장욱진은 하루 네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작품이 안 되고 내부 갈등이 심해지면 그는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꼬박 강술을 마셨다. 부인 이순경(李舜卿, 1920~1922) 여사는 이를 두고 마치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다'고 통탄했다.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는 장욱진에게 산다는 것은 뼈를 깎는 듯한 소모였다. 그래서 그림을 위해 죽는 날까지 몸과 마음을 모두 다 써 버리겠다고 작정했다.
1970년 1월 3일 부인이 아침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화상(畵想)이 떠올랐다며 곧바로 덕소에 내려가 일주일 만에 그림 한 점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나타났다. 부인의 법명을 딴 보살상 <진진묘(眞眞妙)>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일주일간 굶다시피 하면서 작품을 끝내고 그대로 찬 온돌방에 쓰러져 자다 나온 듯한 장욱진은 병이 나 3개월을 드러누워 앓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후일 제자에게 <진진묘>는 집을 팔아서라도 되찾고 싶은 작품이라고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