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지금도 필자가 좋아하는 채소 요리들을 정성껏 마련해 주신다.
박지니
내가 함 여사에게 놀랐던 순간은, 내가 오이소박이나 나물 같은 음식을 즐겨 찾아 먹을 때 그걸 순수히 같이 기뻐하셨던 것도 그랬지만, 어느 날 속이 뒤집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탈진해 누워만 있을 때 어머니는 따뜻한 미음과 몽고간장 한 종지를 쟁반에 받쳐 침대에 가져다주셨을 때였다. 어머니는 식사마다 칼로리 계산 따윈 하지 않으셨고,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아픈 몸을 보듬어 살릴 수 있으리라 진심으로 믿으시는 것 같았다.
즉 어머니는 나를 살찌우기 위해, 병원에서 지시한 '회복'을 달성하기 위해, '애를 굶겼다'고 남들에게 비난 받지 않기 위해 나를 먹이고자 한 게 아니라 나를 돌보는 마음으로 내게 양분을 제공하신 거였다. 나는 이렇게 계략을 못 꾸미는 어머니가 고맙고도 안쓰러웠고, 어머니의 순전한 사랑이 사랑스러웠다(그날 맛본 몽고간장의 맛을 나는 잊지 못한다. 어머니에게 이게 왜 '몽고' 간장이냐고 물었으나 나도 모르겠다는 답만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십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어머니가 쓴 책 <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2019)>에는 툰베리가 더 어렸던 시절 자폐증으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각한 거식증 증상을 보였을 때, 가족이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 설명이 등장한다. 부모는 아이가 유일하게 씹고 소화시킬 수 있는, 부드러운 감자요리인 뇨끼 몇 조각을 아이가 다 먹을 때까지 식탁을 떠나지 않고 기다린다. 그 인내와 희망과 좌절의 고투를, 그 싸움이 결국 필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묵묵히 지속한다.
핵심은 '믿음'인 것 같다. 간혹 섭식장애 증상과 힘싸움을 해야 하더라도, 줄다리기 줄을 아이 편에서 당겨야 한다. 부모는 아이와 한팀이어야 한다. 섭식장애 문제는 아이와 부모가 애초의 관계 맺음을 '회복(reparation)'할 수 있는, 애착과 믿음을 재건할 수 있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함 여사의 현명함은, 당신이 내게 진정 바라는 게 무조건 많이 먹는 게 아니라 적당한 양을 먹고 잘 소화시키고 편안해지는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어머니는 먹을 양을 정해 주셨다. 먹고 부담스러워지면 안 되니 적게 먹어 보고 또 먹으라고 하거나, 대충 먹으려는 내게 핀잔을 주면서 그릇에 예쁘게 담아 직접 차려 주시기도 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사실상 가축 여물 먹이는 것보다 못하게 대할 때도 있었는데, 어머니는 당신 딸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게 싫으셨던 거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다른 음식을 먹어 보라고 내게 안 권하거나,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아 먹자고 운조차 안 띄웠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초대는 강압적이지 않았고 조심스럽고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정도였다. 내가 뚱한 표정으로 대뜸 "아니!" 하고 놀리듯 답하면 "치" 하고 삐친 표정을 지으며 바로 단념하시곤 했다.
당사자에게 편안한 공간과 분위기 만들어주기
만약 친지가 모인 식탁에서 누구나 모든 차림을 일률적으로 먹어야 하는 분위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땐 당사자가 따로 먹을 수 있게, 혹은 먼저 먹거나 나중에 먹도록 상황을 조정해 줄 수 있다. "얘네는 나중에 따로 먹으면 돼요. 먼저 드세요"라고, 가부장제 여성의 밥상에서의 위치를 역이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서로의 식성이나 식사량에 무던한, 편안한 이들끼리의 조촐한 식탁이라면 아이가 용기를 내어 식탁에 합류해 보게끔 유도하는 것도 좋은 시도다.
자신에게 그나마 안전한 편에 속하는 음식만 먹는 아이도 명절상에 올라온 다른 음식에 눈이 갈 수 있다. "동태 전 하나 먹어볼래?" "갈비찜 되게 맛있게 됐는데 먹어볼래? 요만큼만." 하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보는 것도 해볼 만하다.
아이가 먹을 의향은 있지만 겁을 낸다면, 아주 조금만 먹을 양을 정성껏 새 그릇에 덜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미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된 아이를 대신해 한도를 정해주는 것이다. 열에 여덟 아이는 거절하겠지만, 그에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아이는 공포를 거절한 것일 뿐 엄마를 거절한 게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자).
설령 아이가 몰래 음식을 먹어 치우고 먹은 걸 토해 버렸대도, 그 모든 상황이 아이에 대한 질타로 이어져선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단편 <고통>은 제2차 세계대전 시절 작가의 경험에 기초한 작품이다. 여자의 남편은 정치범으로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독일 패전 직후 거의 주검 같은 상태로 수용소에서 구출된다. 말 그대로 뼈만 앙상해진 그는 오랜만에 본 케이크를 바로 먹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먹으면 안 된다'는 아내 말을 듣고는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한다(갑자기 먹으면 소화기관에 무리가 간다는 의사의 권고 탓이었다).
소설에는 안 나오지만, 만약 남자가 몰래 음식을 찾아 꾸역꾸역 삼키고 결국은 - 그게 위장 문제 때문이든, 살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든 - 구토해 버리고 말았다면, 그는 '지금 네가 벌여 놓은 꼴을 보라'라고 가족 앞에서 수모를 당했을까?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섭식장애와 싸우는 이들은 너무도 자주 그런 수모를 당하곤 한다. 가족들도 아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이에게 가족이 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배려는, 그가 편안히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적극적으로, 창의적으로 같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건 어떤 경우라도 해당될 수 있는 얘기겠지만, 특히 집단성이 개인성에 우세해지는 대한민국의 명절에는 더욱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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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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