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해온 KB국민은행 A과장은 지난 2020년 말에도 주가연계증권(ELS) 등 고위험 상품 투자를 권유했다. 전업주부 정아무개(37)씨는 계속된 권유에 2021년 초 홍콩H지수(HSCEI) ELS에 모두 1억2000만원을 투자했다. 투자 이후에도 A씨는 정씨의 예·적금 상품 만기 때마다 친근하게 연락해왔다.
조선혜
정씨는 "A 과장이 보여준 파생상품 중에는 금리가 더 높은 상품도 있었지만, 저는 더 낮은 금리의 상품에 가입했다"며 "제 투자성향이 '고위험'이었다면, 금리가 더 높은 상품에 가입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콩H지수 ELS는 홍콩거래소 상장 기업 중 50개 우량 기업의 시가총액을 가중 평균해 산출한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발행하는 투자 상품으로, 기초자산 움직임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된다. 지수가 만기 때까지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원금과 미리 약속한 수익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상품이지만, 정씨가 가입한 상품의 경우 이미 '녹인(Knock-in)'이 발생했다. 지수가 가입 당시 기준 가격의 50% 미만으로 하락했다는 얘기다.
2021년 초 1만2000포인트대였던 홍콩H지수는 현재 5400포인트대로 내려앉았는데, 시장에선 지수 급등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금융권의 홍콩 H지수 ELS 총 판매 잔액은 19조3000억원이며, 이 가운데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규모는 전체 잔액의 79.6%인 15조4000억원이다. 정씨를 비롯한 수많은 투자자가 모두 수조원대의 피해를 떠안을 가능성이 큰 상황인 것.
녹인 발생 뒤 불안감을 표했던 정씨에게 A 과장은 "앞으로 전망이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남긴 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씨는 "본인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금융지식이 부족한 저를 이용했던 것"이라며 "이후 휴대전화 등으로 연락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의 말이다.
"안정제 없이 생활 불가능, 가정도 위태로워져"
"저는 따로 소득이 없는, 그저 한 가정의 전업주부이자,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는 판매하기 어려운 상품이라는데, 저는 최근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은행원이 오랜 친분으로 제 개인 연락처, 계좌 등을 마음대로 들여다보면서 결국 거액의 사기를 쳤고, 그런 사기 행위에 제가 당했다는 것에 분통이 터지고 피눈물이 납니다.
저는 ELS 사태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안정제가 없으면 육아도, 가정도 돌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또한 저의 남편도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 탈모가 생겼으며, 저희 가정은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정씨는 "당시 예금 금리가 1~2%대였는데, 제가 가입한 상품은 모두 3%대였다"면서 "누가 10만~20만원 더 벌자고 원금 수천만원을 날리겠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금융당국에서 ELS라는 고위험 상품을 은행 일반 창구에서 판매 가능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크다"고 했다.
억울한 마음에 정씨는 금융감독원을 찾았지만, 당국은 은행이 답변을 대신하도록 했다. "투자로 인한 손실 발생 시 그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다"는 것이 골자였다.
정씨는 "가입 당시 자필 서명·녹음 때 A 과장이 '네, 라고 답하면 된다' , '형식적인 것'이라고 말해 그대로 했을 뿐인데, (고위험 성향임을) 다 확인했다는 답변서가 왔다"며 "정말 파생상품을 잘 아는 고위험 성향이라면, 한 달 간격으로 동일한 지수를 추종하는 상품 여러 개에 가입했겠나"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자필 설명' 지켰다면 가입 안 했을 것...금감원도 책임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