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수 생가는 오래도록 빈집으로 남아 을씨년스런 폐가가 됐다. 집 뒤로는
동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신안군
흑산도에서는 닥나무 세와 함께 콩에 부과하던 콩 세도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것도 김이수가 나서 해결했다. 흑산도에는 본래 논이 없고 산비탈에 자갈밭만 있었다. 그것도 지맥(地脈)이 점점 쇠하여 해마다 소출이 줄었다.
주민들은 피와 보리를 추수한 뒤에 그 땅에 이모작으로 콩과 팥 등 잡곡을 심어 생활에 보탰다. 처음 몇 해는 피와 보리만 세금을 내고 콩은 제외됐다. 어느 해 흑산진(鎭)에 사나운 별장(別將)이 부임하면서 섬사람들을 위협해 콩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피와 보리는 원래 세금을 내던 것이지만 보리밭 둔덕이나 고랑에 심는 콩에도 세금을 거두면서 1년에 세금을 두 번 내는 이중과세(二重課稅)가 자행됐다.
별장은 조선시대 산성, 포구, 작은 섬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무관. 관리 위계로 보면 미관말직(微官末職)이었지만 섬에서는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그가 세금 징수와 노역까지 부과하니 섬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권력이었다. 김이수가 나주 관아에 콩세에 관련한 진정을 했지만 흑산도 수군진 별장이 나주와 전주를 다니며 거짓으로 꾸며대는 바람에 콩세 폐지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김이수가 바다와 육지를 건너다니며 3년이나 공을 들이니, 나주 관아도 불쌍한 섬 백성들의 사정을 전주감영에 그대로 보고했다. 전주감영은 "천여 냥이나 받던 것을 하루 아침에 없앨 수 없으니 목화(木化)세라는 이름으로 150냥을 매년 10월까지 납부하라"고 세금을 대폭 감경하는 조치를 취했다. 목화세는 그 뒤 수년간 시행되다가 최도형 별장 때에 이르러 김이수의 설득으로 폐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