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중 장군 생가정읍 과교동에 있는 손화중 장군 생가. 정읍에서 입암을 거쳐 장성 가는 길가에 있다.
이영천
고부 봉기가 박원명의 회유책에 흐지부지 해산한 후,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그를 찾은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손화중 세력이 규모는 물론 개혁 의지에서도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이 무장에서 기포(起包)한 건 이런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그의 능력에 기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조 최제우의 한을 풀고 침탈에 시달리는 농민을 구해내자는 신원 운동 당시, 손화중 포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공주와 삼례집회 주축이었고 광화문 복합상소 때 한양을 벌벌 떨게 하는 혁명적 분위기를 조장한다. 보은집회 당시 어윤중(魚允中)이 양호선무사로 오게 된 배경에도 손화중 포의 역할을 부인하기 어렵다.
보은집회와 달리, 가명을 사용한 전봉준이 동학 주요 지휘부로 처음 등장하는 원평집회에서도 손화중 포의 존재는 묵직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손화중은 최시형 노선에서 벗어나, 전봉준을 비롯한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과 뜻을 같이하기 시작한다.
이런 광대한 조직을 구성하게 된 힘은 그의 품성에서 말미암았다. 손화중은 누구를 만나건 온화한 말투로 반드시 그 사람을 설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온건한 품성이 사람을 끌어모으는 강력한 힘이었던 셈이다.
황현이 전봉준과 손화중을 폄훼하려 의도적으로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글에서 둘의 성정 차이만은 극명하게 엿 볼 수 있다.
봉준은 사로잡혀 화중과 함께 나주에 송치되었는데 화중이 (나주 목사) 민종렬을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소인(小人)'이라고 하자, 봉준은 "뭐 소인이라고, 민종렬을 보고 소인이라고 하는 너는 진실로 짐승 같은 놈이다.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너 같은 놈과 함께 일을 도모하였으니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라며 질타하였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318)
'밀고해 포상을 받으라' 설득 나선 일화
허무하게 해산해버린 보은과 원평집회 후, 동학교도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각 고을 수령의 침탈은 그치지 않았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손화중 포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응 방안이 제시된다. 여러 도인이 합심해, 잡혀가는 사람을 구출해내는 직접적 저항이었다. 동학사 '보은 회집' 기록을 보자.
도인들이 해산 귀가한 후에도 관리들의 계속되는 동학당 체포 침학(侵虐)으로 이전과 다름없이 편안히 살 수 없었다. …(중략)… 각 포와 접이 서로 단결하여 …(중략)… 잡혀가는 사람을 탈취하기로 했다. …(중략)… 동학당원이 사면에서 쏟아져 나와 포교를 물리치고 잡힌 사람을 탈취해 가는 수가 많았다. 이런 일은 충청도나 경상도 보다 전라도에서 먼저 일어났고 전라도에서도 접읍대접주 손화중 포에서 시작되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69에서 의역하여 인용)
재봉기 이후, 허술해진 틈을 타 나주와 운봉이 다시 반기를 든다. 일본군의 남해안 상륙에 대한 개연성과 첩보도 속속 들어온다. 혁명군을 진압하려는 조일 연합군의 남하 작전에도 대비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은 전술을 논의한다. 손화중과 최경선이 대군을 이끌고 광주를 지키면서 후방 나주성을 경계하고 남쪽에서 올라 올 일본군을 막기로 한다.
결국 손화중과 최경선은 광산구 선동 어등산과 용진산을 근거로 나주 민종렬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재봉기 시기를 보내게 된다. 혁명군 본진이 공주와 청주에서 패퇴하고 난 후, 장흥 석대 들판에서 펼친 마지막 전투에 손화중과 최경선 군사들이 엄청난 힘이 되었으리라는 짐작은 그래서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