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룡산성전라 좌도를 관장하던 김개남 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교룡산성. 사진 왼편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라는 안내가 그의 선명성 만큼 또렷하다.
이영천
하지만 김개남은 포수부대와 천민 부대를 보강하며 세력을 지속 확산해 나간다. 농민 위주 혁명군의 정신을 무장시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정치의식을 높이고자 하는 방법이다. 8월 19일(음) 남원 교룡산성을 장악하고 병기고를 털어 무기를 보강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한다.
남원 상회(相會)
이런 김개남의 움직임으로 인해 전봉준이 남원으로 발길을 향한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청일전쟁 승자의 칼끝이 동학혁명군을 향할 것이니, 군사를 나눠 각 지역에 은신하며 전쟁 추이를 지켜보자 주장한다. 집강소 체제의 유지 명분이다.
이에 김개남은 "민중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 어렵다"며 이를 반대한다. 다만 김개남도 남원성과 교룡산성을 보수하며 장기 농성태세를 갖춘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삼남 지방에서 일기 시작한 척왜(斥倭)의 힘을 모으고, 아울러 전봉준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행위였다. 이런 차이가 분명 '남원상회(相會)'를 열게 된 계기였다. 김개남의 기질이랄까, 성정을 즉자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개남의 일련의 움직임으로, 동학혁명 지도부는 숙고에 들어간다. 남원상회다. 8월 말 전봉준 김개남 두 사람은 주변을 다 물리치고, 비밀리 상의하며 혹은 언쟁을 혹은 합의해 가며 주야 8일간 격론을 벌였다고 '남원 동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회합의 결론이 바로 재봉기였다. 그동안 정세를 관망하겠다던 전봉준 태도가 이 회합 후 급변하게 된 사실에서 남원상회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추석이 지난 9월 8일(음)부터 전봉준도 재봉기 준비를 서두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중의 지성은 늘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