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경보 내린 날
김은상
밤새 눈 오고 날이 개었습니다. 쌓인 눈에 햇살이 부딪혀 더 밝은 아침입니다. 소복이 쌓여 만든 유려한 굴곡. 반송, 주목, 향나무... 바늘잎나무들에 꽃이 피었습니다. 기다란 고드름은 햇볕에 녹아 방울방울 떨어집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 떠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멀리 있습니다. 선택한 고독의 댓가지요.
덮인 눈을 갈라 길을 만듭니다. 넉가래에 주욱 밀린 눈덩이가 귀찮은 듯 옆으로 돌아누워 버립니다. '며칠이든 그대로 두고 싶지만, 사람 사는 동네니 네가 비켜다오.' 점심때가 되어 앞집 할머니께서 팥죽을 쑤었다고 가져오셨습니다. "눈 치우느라 고생했네." 눈이 눈과 마주칩니다. '그것 봐라.'
호수도 살얼음에 쉬어가는데 해 저무는 이맘때면 아쉬운 시간만 재빨라집니다. 모두 지워버리려 눈 내렸건만 말라붙은 단풍잎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가지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잠시 소강상태인 눈은 오늘 밤 더 쏟아질 예정입니다.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체념케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다정인 건지 무정인 건지 내 일거리만 늘어납니다.
정원 한구석 눈더미를 비집고 풀잎 하나가 생뚱맞게 섰습니다. 문득 '어쩌면 나도 뽑혀 나갈 잡초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남몰래 멋진 이야기 하나를 품고 살았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 아련합니다. 여름날엔 몰랐습니다. 경멸했던 사람들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일이 잦아지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고 모두 아는 척 가르치려 드는 날이 올 줄 말이죠. 솎아내기 전 이곳에 깃든 것이 다행이죠.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시골에 온 후론 눈 뜨는 것이 기쁩니다. 예전엔 아침마다 멍하니 갈피를 못 잡곤 했습니다. 살아온 날은 셀 수 있지만 살아갈 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이 전부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소중합니다. 반갑게 맞을 수 있다면 잘살고 있는 것이겠죠? 날 저물어 오늘 또한 지난날이 되었지만, 내일에 오늘이 오면, 눈 뜨자마자 또 한 번의 삶, 을 잘 넘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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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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