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을 연구하고 현창하는 활동을 해온 현진건학교는 2021년부터 현정건 순국 추념 행사를 12월 30일에 가져왔다. 사진 왼쪽은 2021년 12월 30일 추념 행사 때 사용한, 오른쪽 사진은 2023년 12월 30일 추념 행사 때 사용할 포스터이다.
현진건학교
현정건(玄鼎健)은 1893년 6월 29일 연주현씨 현경운(玄擎運)과 완산이씨 이정효(李貞孝)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은 소설가 현진건으로, 형제 모두 대구가 출생지이다. 대구가 정건·진건의 고향이 된 것은 본디 서울에 살았던 아버지 현경운이 1895년 이래 대구에서 거주했기 때문이다.
현경운은 1911년 퇴임할 때까지 대구전보사(大邱電報司) 사장(司長)으로 재임했다. 인터넷 또는 신문기사 등에 현경운이 대구우체국장을 역임했다고 적은 사례들은 잘못이다. 청일전쟁 때 남해로 들어온 일본군이 부산전보사와 창원전보사부터 점령한 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구전보사는 우체국 성격이 아니라 국가정보기관이었다.
대구는 현정건·진건 형제의 고향
현경운은 국가정보기관 간부이면서도 야학 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현경운을 도와 야학 교사로 일한 사람 중에는 그보다 10세 연하의 이일우가 가장 유명하다. 당시 대구 최상위급 민족자본가이던 이일우는 이상화의 큰아버지로, 1904년 계몽교육공간 우현서루를 세워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다가 191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 당했다.
현경운과 이일우는 망국 직전 취학기를 맞은 아들과 조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서당에 보내고 우현서루의 교육기관인 시무학당에 다니게 했다. 대구사회의 거물 유지들이었던 현경운과 이일우가 야학과 계몽기관을 설립하고, 직접 교사로 헌신했으며, 자녀와 조카들을 일제 교육에 물들까 우려하여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사로이 보아넘길 일이 아닐 것이다.
17세에 중국 망명, 26세에 의정원 의원
현정건은 17세이던 1910년 중국으로 먕명했다. 독립지사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상당히 이른 시기의 망명이었다. 그 결과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 이미 9년을 거의 넘겨가고 있을 만큼 장기간 중국에 체류한 선배(?) 망명가로 여겨져 중국통의 명망을 얻었다. 게다가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에 두루 능통하였다. 26세밖에 안 된 그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데에는 그런 점들이 크게 작용했다.
1918년 현정건은 아우 현진건과 상해에서 약 1년 동안 함께 생활했다. 이때 현진건은 후장(滬江)대학 독일어 전문부에 다녔는데, 아들을 두지 못한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지목되면서 귀국했다. 그 이후 형제는 (감옥과 재판정 아닌 평상의 공간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한때 상해에서 함께 살았던 형제, 그후 못 만나
임시의정원 요인으로 활동 중이던 현정건은 사회주의 계열 한인사회당에 친밀감을 느끼고 적극 가담했다. 1921년 초 이동휘가 임시정부 조직 쇄신안이 수용되지 않아 국무총리직 사퇴와 임시정부 탈퇴를 결행할 때 함께 행동했을 만큼 그의 측근이었다.
임시정부의 위상 약화 및 조직개편론을 둘러싼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을 언급하면 기사가 너무 길어진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2012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의 결론 일부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현정건은 자발적으로 사회주의 계열 운동조직에 몸담았고, 그 계열의 여러 좌파 조직에도 투신하였지만, 그는 결코 배타적 계급노선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 운동 노선에만 한정되지 않고 임시정부 개조와 민족유일당 조직 운동 등 통합 운동에도 투신하여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상해의 대한교민단, 고등보수학원 및 삼일공학 등 임시정부 직계 또는 관련 외곽 기관이나 조직에도 가담하여 성실히 활동하였고, 고려공산당과 같은 좌파 조직보다 청년동맹회나 독립당촉성회와 같은 좌우합작 조직에서 더욱 돋보이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