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주인공이자 빌런인 전두광은 그야말로 관객들의 분노유발자다. 사실 전두광의 모델인 전두환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미 현실세계에서 비호감도가 높은 인물이다. 지난 11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비호감도 71%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1212 사건 이후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일, 이후 1987년까지 이어진 독재까지, 전두환이 비호감인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나라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꿰차고 독재를 일삼은 정치군인이라는 점이 전두환(혹은 전두광)의 악역 캐릭터의 핵심이다.
그런데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는 '정치군인'이라는 존재는, 총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본업이어야 하는 군인들의 예외적인 상태일까? 쿠데타는 군대가 오작동한 결과가 아니라 군대의 정상적인 작동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한다. 전두환 이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스스로 군사혁명이라 부르며, 혁명 공약을 내세우고 말미에 혁명 과업이 성취되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겠다고 밝혔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정희와 전두환만, 다시 말해 한국만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에서 군대의 쿠데타는 일상이다. 외국군대와 싸워본 지 100년이 넘었다는 태국 군대는 지난 100년 동안 쿠데타만 19번을 했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고자 하는 정치군인은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일반적인 군대 자체의 속성이다. 쿠데타를 하는 군대가 따로 있고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군대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군대는 젠더화된 군사주의를 작동원리로 삼는다. 군사주의는 일반적으로 군대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사회 일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 혹은 갈등 상황 등 여러 사회문제에서 군사적 수단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고방식이나 문화를 뜻한다. 군사주의의 세계관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눈다. 정의와 불의, 적군과 아군, 승리와 패배.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부정의인지 묻지 않고 이미 정해진 정의를 위해 아군의 승리를 목표를 군사적인 수단으로 쟁취한다.
무엇이 정의냐는 질문은 용납되지 않으며 이미 정해져 있는 정의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아이러니는, 충돌하는 두 집단 모두 스스로를 정의로 여긴다는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쪽이나 쿠데타를 막는 쪽이나 각자가 스스로를 정의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은 절멸해야 하는 불의라고 여긴다. 이를 위해 군사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또한 젠더화된 군사주의는 가부장제와 적극 공모한다. 가부장제는 안보 영역에서 두 가지 층위의 이분법으로 작동한다. 보호하는 남성과 보호받는 여성이 한 층위이고,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와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가 두 번째 층위다. 보호받는 자와 보호하는 자로 나뉜 세계에서 민주적 시민의 역할은 제한된다. 또한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이들과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이 나뉘는 세계는 필연적으로 인권과 휴머니즘의 가치를 배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의 정치는 폭력의 정치다. 그것이 정의로운 전쟁이든, 정의롭지 못한 쿠데타든 다르지 않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사익을 위해 쿠데타를 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정치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고, 그것은 군인으로서 가장 익숙한 방식이었다는 것이 우리가 쿠데타를 바라볼 때 기억해야 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우리를 열받게 한 전두광이라는 존재는 참군인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군대의 본질적인 모습이 1980년대 한국이라는 역사성 속에 발현된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군대의 본질이 쿠데타와 멀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군인정신을 회복하고 참군인을 칭송하는 게 아니다.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답을 군대 밖에서 찾아야 한다. 그 지점에서 이태신이라는 인물을 영화가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신의 정의로움은 군인정신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