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현씨의 고등학생 시절과 유금열씨의 젊은 시절 사진.
이중현, 유금열
남편은 결혼 전부터 5톤 트럭 1대와 12인승 승합차로 유통업에 종사했고, 아내는 시댁 식구들을 뒷바라지 하며 남편을 도와 홍성 금마면에서 농약을 판매했다.
이씨는 "당시 지역에 차량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없다보니, 농산물을 실어다 서울 가락동 경매시장에 대신 팔아주는 일을 했다. 돌아올 땐 주류, 음료수, 과자, 생필품 등을 시중가보다 약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 싣고 내려와 지역 가게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고 설명한다.
경기도 안양에 청과상회를 두고 홍성과 서울을 오가며 유통업에 종사했던 부부는 이씨의 처남이자 아내 유씨의 오빠가 운영하던 가게를 이어받고서는 '슈퍼' 운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씨는 "가게 운영에 소극적이었던 처남과 달리 본격적으로 운영한 장본인은 아내다"라고 말했다.
대원슈퍼 역시 남편이 공급하는 상품들을 취급했다. 다른 가게들보다 가격이 착하다보니 동네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결과 지금은 인근에서 유일한 구멍가게가 됐다. 유씨는 "2025년 8월 15일이면 정확히 40년이 된다. 한 10년 전까지 그럭저럭 영업이 잘 됐다. 그땐 손님이 많아 먹을 틈도 없었지만, 종일 굶어도 배가 안 고팠을 정도였다"고 전성기였던 시절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버스기사 숙소로 사용됐던 일이 기억난다"며 예전 가게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예전에 취급했지만 지금은 가게 진열대에서 사라진 대표적인 물건들로 크레용, 등사용지 등을 언급했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학용품을 사러 왔고, 학교 교사들도 등사용지를 사기 위해 가게 문턱이 닳도록 찾았다고 한다. 기저귀·생리대·돗자리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동네 만물상이었던 셈이다.
"예전엔 종류만 100여 종이 넘었는데 지금은 10여 종으로 줄어든 것 같다. 버스가 다녔으니까 버스 승차권도 팔았다"며 그리움을 전한다.
손만 대도 힘없이 스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흙벽 위로 허름한 기와지붕이 얹혀 있는 모양새가 위태해 보인다. 웬만한 농촌마을에도 마트와 편의점이 들어서는 시대에 이런 구멍가게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가게가 너무 오래되고 낡아 정리할까 고민했다는 부부는 쉽게 건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게는 안쪽에 부부의 살림집과 연결돼 있다. 흙으로 지은 집과 가게는 유씨의 부모가 살던 집이다. 부모님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추억이 서린 공간인데다, 30대에 만난 남편과 함께 생업을 꾸리며 3남매의 자녀를 키우던 사업장이다. 부부에게는 단순한 구멍가게 이상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부부는 가게 운영을 위해 아내의 고향집이기도 한 대원슈퍼로 거처를 옮기면서, 봉산면 최초로 상수도를 개설한 일을 자랑스러워했다.
낡은 것의 소박함, 정겹고 아름답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