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유족회장 전미경과 그의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김영희
2021년 8월 골령골 4번째 발굴을 마치고 한 달 후, 지인이 대전유족회장을 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나게 약속을 해줬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전미경 회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유족 세 분과 함께 계셨는데 첫 대면에서 70여 년 뼈저린 삶이 얼굴에 고스란히 그려지는 듯 보였다.
대화 중 전미경 회장은 자신이 쓴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를 한 권 주신다. 그리곤 대전 골령골에 관련된 책들 몇 권 더 주셨다. 책을 받고 나오다가 먹었던 밤이 생각나 '지난번에 가져오신 밤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서둘러 진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서로 먼 거리상 전화 통화로 이런저런 사연을 듣게 됐다.
시집의 이름 전숙자와 현재 이름 전미경
전미경 회장의 아버지 전재흥은 연희전문 출신인 삼촌 전재원의 인공 시절 활동이 문제가 돼 피신해야 할 처지가 된다.
전재흥은 삼촌을 살리기 위해 본인의 도민증을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되어 피신하다가 경찰서에 두 번째 잡혀가서 사살된다. 이후 전미경은 할머니 구덕환, 할아버지 전봉준 슬하에서 자란다.
큰아들은 잡혀가서 학살되고 둘째 아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정신이 아닌 할아버지가 차일피일하다가 손녀 이름을 호적에 올리지 못하였다. 4살 때가 돼서야 할아버지는 이장에게 호적을 올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때 아버지가 '전미경'으로 이름을 지어놓은 상태였지만, 호적계에 도착한 이장은 전미경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이장은 호적계 직원과 의논하여 '전숙자'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리고 말았다. 그녀는 전숙자로 70여 년간 살다가 이제야 아버지가 지어주신 '전미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통화 1] 전미경 대전유족회장과 첫 번째 사연
"회장님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네, 선생님. 저녁은 드셨어요?"
"예, 회장님. 아버지는 무슨 사연으로 골령골에서 학살되셨나요."
"우리 아버지는요, 동생의 피신 때문에 덩달아 천방산(집 근처)으로 몸을 피했다가 '딸 미경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온 거여유."
들뜬 마음으로 집에 온 아버지는 전 회장이 태어난 지 3일 만에 곧바로 경찰에 붙잡혀 충남 시초 지서로 연행되었다. 1949년 1월 8일이었다. 엄마(장복순, 1924년생)는 아버지가 잡혀갈 때 경찰과 아버지를 따라 허리까지 오는 눈길을 10리 정도 걸어서 시초 지서에 도착, 지서장에게 항의했다.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에 가두는 거예유?' 하니까 '당신 시동생 때문이야'라고 했데유. 엄마가 항의 했지만, 지서장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데유. 엄마가 '내 남편을 풀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유' 하면서 묵비권을 행사했는디유.
엄마가 해산한 지 3일밖에 안 된 것을 알고 경찰이 자리에 앉으라고 달랬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데유, 3일간 날밤을 새우고 심지어 대소변을 선 채로 봐 버렸데유. 그러니깨 경찰들이 기겁하여 아버지께 각서를 받고 석방했데유."
"엄마가 대단한 분이시네요."
"예, 우리 외증조할아버지가 참봉(종9품) 벼슬을 지낸 집안이었데유.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척 예뻐하셨데유."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아버지를 살렸군요."
"예, 한편 저는 태어난 지 3일 됐지만 엄마 젖을 3일 동안 먹지 못해 할아버지가 우유를 먹였다고 해요."
한약방 주인의 사악함
"회장님, 언니 오빠가 있었어요?"
"예! 언니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데유. 그런데 오빠(전생현)는 4살 때 홍역을 앓아서 심하지는 않고 눈곱이 째끔 끼일 정도였데유. 그래서 아버지가 동네 한약방에 약을 짓기 위해 갔는데 한약방 주인은 아버지한테 약을 지어주지 않고 아버지보다 뒤에 온 손님을 먼저 지어 주었데유.
이후 아버지 약을 지어주는데 아주 신중하게 짓 드래유. 집에 와서 그 약을 먹이니까 아이 몸이 불에 타듯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데유. 그래서 아버지는 석방 후 저를 안고 명세했데유. 위에 자식 둘을 잃었기에 저를 더욱 끔찍하게 좋아했고, 아버지가 '내가 죽으면 이 자식이 어찌 살라고 안 된다' 하면서 결심했답니다.
한약방 주인은 우익 사람이라 저의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고 경찰에 신고했데유. 빨갱이 잡아 가두라고. 경찰이 아버지를 조사하니까 죄목이 거의 없어 석방하려고 했는데 우익인사들이 탄원서까지 넣어서 아버지를 석방 못 하게 하였데유.
아버지가 풀려나면 독약을 지어준 죄로 한약방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던 거지유. 아예 우리 집안을 몰살해 버리도록 작정을 한 것 같아유. 그래서 자신이 살인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모진 고문과 구타 끝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까지 고문하여 강제 살인자로 조작하여 사형을 언도받았는 것 같아유."
두 번째 잡혀간 아버지의 행방
"회장님! 그다음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는데요?"
"엄마의 목숨 건 항의로 지서에서 풀려났지만 계속 아버지는 피신하면서 살았시유. 어느 날, 아버지가 제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데유. 태어난 지 두 돌이 되었건만 아직도 서서 걷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래유.
아버지의 먹을 것을 가져간 엄마가 '미경이가 섰어요'라는 소식을 전했더니, 그날 밤늦게 아버지가 마을로 내려와 딸의 걸음마를 보며 기뻐했데유. 근데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데유. 경찰들이 군홧발을 신은 채로 방문을 열며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갔데유. 그날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유."
전 회장이 말을 이어가며 눈물을 흘렸다.
'잡혀가신 아버지는 어디로 갔어요'라고 묻자 "잡혀간 지 몇 개월 후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이장인 라권집을 살인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써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유"라고 한다. '뭐라고 예? 회장님, 무슨 살인요? 아버지가 누굴 살인했다고요?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말씀해보세요'라고 하자 잠시 정적이 흐른다.
"아버지가 숱한 고문을 당한 것을 동료 수감자의 증언으로 익히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강압 수사와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 것은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의 재심 결정에서 밝혀진 바 있시유."
'재심 결정요? 이건 또 무슨 말씀인지요' 여쭤보니 또 한숨을 쉬더니 그녀가 "우리 아버지를 경찰과 군법회의에서 빨갱이로 몰아 살인자로 조작해 사형했는데, 억울하게 학살당한 우리 아버지를 62년 만에 명예 회복을 시켰시유"라고 말한다. 전화기 저편에서 '흐흐흐 흐흐흐'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필자는 많은 피학살자의 사연을 들어 봤지만, 회장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